brunch

매거진 춘춘매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춘춘 Mar 20. 2021

미움을 치료하는 응급조치

미운 날의 남편

비가 오는 날씨도, 하루 종일 가족과 집에 있는 것도 다 좋았는데 저녁이 위태로워졌다. 


거실이 좀 복잡해 보여 소파 위치를 바꿀까 말까 얘기를 했더니 또 책 거치대를 버리자고 했다. 

저 거치대는 아이가 어렸을 때 쓰던 것인데 지금은 작은 화이트보드를 올려놓기 딱 좋아서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지만 정리 얘기만 나오면 거치대를 버리자고 한다. 


이번엔 정말 이해를 시켜서 향후 십 년간은 거치대를 버리자는 말이 안 나오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성의껏 꼭꼭 거치대의 필요성을 설명해주었다. 


'안 버린다고 하면 되지 훈계를 듣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훈계라니. 

내가 눈을 치켜뜨지도 않고, 웃음도 약간 섞어서, 말투도 마지막에 '솔'톤까지 올리면서 상냥하게 했건만. 

그런데도 이 얘기를 다시는 안 나오게 하겠다는 나의 의지가 내비쳤는지 기분이 나빴나 보다.


아무튼 설명을 안 해주면 의견을 무시한다고 삐질 거면서, 설명해 줬더니 훈계하는 거 같다고 하며 돌아서는 남편의 뒤통수가 엄청 미웠다. 

저쪽에서 먼저 화를 내지 않는데 내가 화를 내버리면 진다. 남편은 화를 잘 안내서 주로 다혈질인 내가 화를 내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명확한 가해자가 되어 찜찜하게 지는 게임이 돼 버린다. 

이제 나도 잘 안 넘어간다. 


한마디 더 하고 싶은걸 꾹 참고 서있었더니 내가 있는 자리를 멀리 빙 둘러 왔다 갔다 한다. 

본인도 화났다는 강력한 표현이다. 

청소를 마치고 샤워를 하고 나와서는 말도 안 되는 노래를 조금 흥얼거린다. 

어색하니까 저러는 거다. 


아직 토요일이 여섯 시간이나 남았고 내일은 일요일인데 상한 기분을 그대로 안고 가면 주말이 위험하다. 

하는 수 없다. 

빨리 원상 복구해서 토요일을 지켜야 한다. 

남편이 기분이 상했을 때 하는 행동 중에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고개를 약간 갸웃하며 입술을 조금 내밀어 비트는 행동이다. 

그때는 정말 너무 미워서 입을 꼭 꼬집는 상상을 한다. 아직 거기까지는 안 갔다.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 위해서 남편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한참 쳐다보았다. 집이 엄청나게 큰 것도 아니고 2미터 앞에서 분명히 내가 보고 있는 게 느껴질 텐데 못 본 척을 한다. 눈을 안 마주치려고 애쓰는구만. 


너무 오래 쳐다봐서 어쩔 수 없이 눈이 마주치니까 눈을 크게 뜨고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소리 나지 않게 입으로 '왜?'라고 물어본다. 

알면서 물어본다. 

아니야, 라는 뜻으로 최대한 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어색한 기운이 옅게 감돌고 있는데 나만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미안하다고 하기엔 내가 잘못한 게 없는 거 같아서 그럼 안될 것 같다. 

이런저런 실없는 대화로 어색함을 날려버리러 나가야 되는데 아직 미운 마음이 남아있어서 나가기가 싫다.


어쩔 수 없지. 응급조치를 해야겠다. 


아까 걸레질까지 한 거랑, 어제저녁에 나보다 먼저 와서 아이랑 샤워한 거랑, 조금 전에 빨래를 한 바구니 해서 널고 있던 거랑... 또...  내가 좋아하는 식빵과 딸기를 부탁도 안 했는데 사다 준거랑 그런 걸 몇 가지 급히 떠올렸더니 미운 마음이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오늘 건은 나 아플 때 안타까워하던 모습까지 가지 않아도 이 정도로 응급조치가 됐다.

남은 토요일을 구하러 거실로 나가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매일 죽을 준비가 주는 평온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