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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Feb 27. 2021

매일 죽을 준비가 주는 평온함

하드보일드 하드 럭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하드 럭'에서, 죽은 언니의 물건을 보며 화자가 이런 생각을 한다.

언니가 쓰던 파운데이션을 만져보았다. 깔끔한 언니는 거울도 말끔하게 닦아 놓았고, 스펀지도 깨끗했다. 그 하나하나마다 언니를 느꼈다.

그때, 이 부분을 읽다 말고 내 화장품 가방에서 컴팩트를 꺼내 보았다.

'트윈케이크'라고 하는, 파운데이션과 파우더가 섞인 베이스 화장품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내 트윈케이크의 스펀지는 하도 빨지 않아서 군데군데 떡져 있었고, 거울에는 화장품 가루와 지문이 가득 묻어있어서 손등으로 거울을 한번 문지르고 봐야 화장이 가능할 만큼 더러워져 있었다.

식물인간이 된 언니의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읽으며 울다 말고, 내 트윈케이크를 꺼내보고는 화들짝 놀랐던 것이다.

내가 만약 갑자기 죽거나 식물인간이 되면, 내 동생이 내 트윈케이크를 보고 이렇게 생각하겠는걸.

언니가 쓰던 트윈케이크를 만져보았다. 늘 지저분하던 언니는 거울을 닦지 않아 얼굴이 간신히 보일 정도였고, 스펀지는 사고 나서 한 번도 빨지 않은 것 같았다. 그 하나하나마다 언니를 느꼈다.  


내가 죽거나 식물인간이 되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는 비극이지만, 남은 사람들이 내 물건을 만져보며 참 더럽게도 해놨네,라고 말할 것을 상상하니 뭔가 망신스러웠다. 책을 읽다 말고 휴지를 꺼내서 트윈케이크의 거울을 닦았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 퇴근길에 강남 순환도로를 통과하고 있을 때였다.

긴 터널 속에서 갑자기 안개 같은 것이 자욱해졌다. 차가 안갯속으로 진입하는 것 같았고, 급기야는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니 빨리 달릴 수도 없고, 뒤에 차가 오고 있으니 멈출 수도 없어서 운전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시속 30킬로미터 정도로 다들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분명히 사고가 난 것 같은데, 이 길을 잘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점점 불안해졌다.


그렇게 천천히 달리면서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는 말은 그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가족들에게 전화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전화기를 힐끗 보다가 회사일 생각도 났다. 내가 만약 지금 죽으면 정대리가 그 일을 맡아서 해야겠네, 컴퓨터에 폴더 잘 찾으려나? 못 찾으면 욕하고 싶겠지만 차마 욕은 못하겠지, 이런 생각.

우리 집 계좌 관리는 내가 다 하고 있는데 남편이 적금 들어놓은 은행을 다 알고 있을까? 아, 요즘은 금융 통합인가 뭔가 그런 거 있어서 다 알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가족이니까 조회가 되겠지. 그럼 주식계좌도 알게 될 테니까 내가 사놓은 종목 많이 떨어진 것도 알게 되겠네, 그건 좀 부끄러운걸.

남편은 좀 있다가 재혼하겠지. 아들은 우리 엄마가 지금도 잘 봐주고 있으니 큰 문제없을 거야. 그래도 아들이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재혼 안 하면 좋겠는데, 너무 욕심인가.  


그 짧은 시간에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내가 갑자기 없어져도 현실적인 문제들은 그런대로 해결될 것 같았다. 큰 문제는 없겠군.

그치만 많이들 슬퍼할 거야.

특히 우리 아들은 사춘기를 힘들게 보내겠지. 아이한테 평소에 편지라도 많이 써줄걸 그랬어, 나중에 읽을 수 있게. 마트에 배송시켜놓은 것들이며, 택배 주문한 것들이 며칠 동안 도착할 텐데 그때마다 내 생각이 나겠지. 내 칫솔이랑 화장품들 치울 때도 마음 아프겠어.

한동안 연락 없던 친구는 내 소식을 알면 당황할 거야. 회사 동료들도 내 자리를 정리할 때는 울어주겠지. 근데 서랍 속에 남들 보여주기 민망한 것들은 넣어놓지는 않았었나? 이런 생각까지.


서서히 출구가 가까워지고,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 보였다. 그때까지 연기는 자욱했지만 어디에서 온 연기인지는 알 수 없었다. 흔적이 없는 것을 보니 큰 사고는 아니었던 것 같고, 차량이 고장 났거나 터널 안 어딘가에서 뭔가 이상이 생겼거나 그랬을 것이다.

밝은 햇빛 아래서 조금 전에 들었던 수많은 생각들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한 5분도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에 왔다간 것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언니의 파운데이션'이 한번 더 생각났다.




엄마가 속 터지는 소리를 해서 한껏 쏘아붙이고 돌아설 때, 출근길에 남편과 다투다가 툴툴대며 차에서 내릴 때, 아이가 늦게 일어나 아침부터 실랑이를 하고 집을 나설 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사소한 갈등 속에서 불현듯 죽음이 생각날 때가 있다.

'이렇게 집을 나섰다가 이게 마지막이 된다면 얼마나 후회스러울까, 후회할 시간도 없는 일들은 언제나 생길 수 있는데.'

죽음을 생각할 때 드는 두려움이나 우울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다.

오히려 언제 마감될지 모르는 나의 삶이 갑자기 더 소중해진다.

아무것도 아닌 일들로 마음을 다치는 건 시간이 너무 아깝다.


한동안은 죽음이 주는 두려움에 우울함을 버티기 힘들었다. 그러나 삶도 죽음도 가볍게 느껴지던 순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는 무게가 삶이나 죽음 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울도 서서히 걷혀 갔다.

모든 순간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 우울하다. 피로감을 버티기 힘들다.

하지만 즐거운 순간들을 많이 만들고 힘든 시간을 줄여가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삶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다. 그 방법으로 자주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오히려 새로운 빛을 준다.

 

지금도 내 화장품 가방은 어수선하고, 컴팩트의 거울은 얼룩덜룩하다. 결국 잘 정리하는 성격은 아직까지 갖추지 못했다. 이건 좀 타고나야 하는 건가. 화장품 거울을 닦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니까, 그건 그냥 조금 털털한 사람 정도로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대신 지나고 나서 후회할 일을 많이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침에 급히 갈아입고 팽개쳐 놓은 옷들이 보이면 주섬주섬 챙겨서 한쪽으로 치워놓기라도 한다. 너무 정신없는 컴퓨터 폴더들은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도록 제목을 따로 붙여 놓는다.

그리고 아침에 헤어지고 저녁에 만나는 잠깐의 이별에도 기분 좋게 돌아서려고 노력한다.

매일 죽음을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내가 지난 간 자리가 너무 한숨이 나오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오늘은 주말, 봄이 가까워지는 듯 햇살이 좋다. 어젯밤에는 봄밤 냄새도 났다. 오늘은 정말 저 블랙홀 같은 냉동실을 정리하고 말 것이다.

아이는 늦잠을 자고, 남편은 자동차 엔진오일을 갈러 나갔다. 더없이 평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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