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약 한 달 동안 아기보기와 모유수유, 백신 영어로 알차게 휴가를 마치고 3개월 만에 회사에 복귀했다.
'그 후 영어를 큰 소리로 읽는 공부를 꾸준히 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고 나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되었다.'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드라마틱하게 성과를 얻었으면 좋으련만 영어공부는 다시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복귀 후 일 따라잡으랴, 모유 수유하면서 출퇴근하랴, 집에 오면 아기 재우랴, 몇 달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영어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물리적인 시간도, 정신적 여유도 확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작심삼일을 반복하던 과거의 무수한 공부법과는 다르게 이 '백신 영어' 방법에는 꾸준히 한다면 뭔가 성과가 있을 것 같은 확신 같은 것이 있었다.
아이가 조금 커서 걸어 다니고 밤에 잠도 통잠으로 잘 무렵 다시 본격적으로 백신 영어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새책으로 쌓아놨던 EBS Power English를 싹 버리고 다시 정기구독을 시작했다.
(뭘 하려면 책부터 사대는 통에 내가 사들인 영어공부, 영어시험 준비 책값만 해도 어학연수를 족히 하고도 남을 정도가 아닐까 싶다.)
하루에 한 페이지씩 읽기로 계획했는데 한 페이지가 너무 많았다.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은 새벽시간 딱 한 시간인데 그때 하루 분량을 마치지 못하니 성취감이 들지 않고 늘 쫓기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하루 반 페이지로 줄였다.
하루 반 페이지를 공부하고 다음날은 어제 것까지 합해서 한 페이지, 그다음 날은 누적해서 1.5페이지, 그렇게 하루 세 페이지, 열 번씩 읽기를 반복했다.
너무 적은 양이라서 실력이 늘지 않을까봐 걱정되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그냥 주어진 시간이 이것밖에 되지 않으니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주말에 아기와 집에 있는 것이 힘들어 종종 키즈카페를 가기도 했는데 그곳에서도 아기가 노는 것을 보며 중얼중얼 영어 읽기를 하곤 했다.
한자리에서 책을 펴놓고 읽을 시간만 찾다보면 건너뛰는 날이 많아, 책을 사진으로 찍어서 스마트폰에 저장해놓고 수시로 읽으며 하루분의 횟수를 채우기도 했다.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이동 시간에, 집에서 아기띠를 하고 아기를 재울때도, 틈틈히 해야만 하루의 분량을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달가량 지속하다 보니 속도가 조금 빨라지기 시작했다. 2개월 정도가 지나고 나니까, 난 따라 읽는 것만 했을 뿐인데 이상하게 듣기가 잘 되는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매일 적은 양이어도 꾸준히 단어를 외우다 보니 날이 갈수록 단어가 이상하게 빨리 외워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소리 내어 읽기만 3개월 정도를 유지하고 재미 삼아 토익시험을 한번 보았다.
취업 후 토익은 아예 거들떠도 안 보고 살았는데 몇 달 영어공부를 하다 보니 토익을 테스트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사이 토익은 유형도 바뀌고 문제도 좀 어려워졌지만, 시험공부도 하지 않았고, 높은 점수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토익 문제집을 한번 풀어보지도 않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역시 시간이 많이 부족해서 몇 문제는 찍었고, 문법은 여전히 확실하게 알고 답을 쓴 문제가 몇 개 되지 않았다. 하지만 듣기와 독해가 예전보다 분명히 조금 편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결과는, 꽤 놀라웠다.
그렇게 아등바등해도 안 올랐던 토익 점수가 7 백점대 중반에 가깝게 올라와 있었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점수가 반갑기도 했고, 공부를 거의 안 한 것 같은데 오른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토익 학원을 다니고 문제집을 풀면서도 대체 토익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는데, 따라 읽기를 3개월 하고 토익 점수가 오른 것을 보니, 이 공부법이 답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앞길이 보이지 않아서 기를 쓰고 열심히 갈 마음도 들지 못했던 십여 년의 영어 공부 여정에서 이 길이 맞는 것 같으니 한번 해보고 싶다는 희미한 확신 같은 것이 들었던 첫 번째 경험이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바쁘던 당시에 별 목적도 없이 왜 그렇게 영어 공부에 집착했느냐고 묻는다면 정확히 답하기는 힘들다.
그냥 출산과 육아 이후 정신없는 생활 속에 완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집어 넣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없는 시간을 쪼개 공부하면서 자기 만족에 취하는 일종의 허영심이었을 수도 있다.
안간힘을 쓴것에 비하면 결과가 보잘것 없는데 너무 가성비 없는 짓 아닌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는 중에 내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시절은 언제나 올 수 있고, 그때 잠깐이라도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시간을 끼워넣는 행위는, 분명히 정신을 차리고 숨 쉴 수 있는 순간을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그것에 영어공부든 무엇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