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뱃속에 있었지만 초면인 인간이 그렇게 애틋한 것도 신기했고 아기를 안고 있을 때 느껴지는 충만함은 평생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건 그렇지만, 출산휴가를 보내며 이런 긍정적인 감정은 하루 24시간 중에서 한 15분 정도 느꼈을까?
임신 기간 중 회사를 다니면서 출산휴가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3개월이라니, 3개월간 회사를 가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을까.
아이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지.
그 철없는 생각은 출산과 동시에 박살이 났다.
출산 휴가만 손꼽아 기다리던 임신 36개월 차에 혈압이 높아 갑자기 아기를 낳게 되었고, 그 부작용으로 출혈이 심해 추가 수술 끝에 목숨이 위험한 고비를 넘겼으니 퇴원 후 체력이 돌아오는데 한참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출혈로 인해 혈액 수치가 정상이 아닌 채로 조리원 생활을 하다 보니 그 비싼 조리원에서의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한 것도 억울했다.
더구나 당시에는 아기가 걱정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 모든 일에 자꾸 죽음을 결부시키게 되는 것 같았다. 내가 다시 출혈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아기가 조금만 오래 울어도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
그렇게 조리원에서 나와 친정집에서 2주를 머물고, 아기와 함께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아기가 태어난 지 오십일이 넘어가 그나마 밤에 잠도 서너 시간씩 자주고, 낮에도 아기가 예쁘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의 여유는 생길무렵까지도 아기를 보고 있으면 걱정이 되어 마음을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아기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기를 보고 있는 것이 싫었다.
낮시간 동안 아기와 둘이 있으면서 이런저런 세상의 불행한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니 정말 우울증이 오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보통의 갓난아기 엄마들이 겪는 고통도 느끼고 있었다.
자는 것도 먹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무엇보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책 한자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지치고 힘들었다.
지금 이 공간 말고 다른 세상의 공기를 느끼고 싶었다. 그때, 세상을 보는 창구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 컴퓨터로 찾아보는 블로그였다.
당시에 나는 스마트폰이 없었다.
내가 출산휴가를 가기 전에 우리 사무실에서 블랙베리를 쓰는 단 한 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내가 출산휴가에서 복귀한 후 나를 포함한 두세 명을 빼고는 모두 아이폰을 손에 들고 있었으니 나의 출산휴가는 스마트폰의 보급시기와 맞물려 있었던 것이다.
아기가 잠깐씩 잘 때면 컴퓨터를 켜고 '맘스홀릭'에 들어가서 갖가지 아기의 증세를 검색하며 걱정과 안도를 반복하다 보니 그것도 지치는 일이었다.
원래도 걱정을 달고 사는 스타일인데, 걱정병 환자가 아기를 낳고 나니 애가 숨만 좀 크게 쉬어도 어디가 안 좋은가 가슴이 두근거리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완전히 다른 세상의 블로그 들을 검색해 보곤 했다.
뷰티 블로그, 운동 블로그, 영어 블로그 등등 세상을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신기해하며 둘러보는 것이 휴식이었다.
그러던 중 "뉴욕 의사의 백신 영어"라는 블로그를 알게 되었다.
한국 의사가 영어권 국가에서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영어를 터득해 가는 과정을 솔직하고도 유용하게 풀어놓은 알찬 블로그였다. 글솜씨도 있는 분인 데다가 영어를 힘들어하는 한국 사람들의 심정을 어찌나 콕콕 집어주었는지 글을 읽으면서 "맞아, 맞아"를 몇 번이나 외쳤다. 블로그는 책으로도 나와있어 바로 주문을 했다.
그 책에서 소개하는 기본 공부법은 '소리 내어 책 읽기'였다.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권하던 방법이긴 했지만, 저자가 그 방법을 통해 영어공부에 성공하여 뉴욕에서 의사를 하기까지의 과정이 세세하게 나와있었고, 결국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진솔하게 말해주고 있어 한번 따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뭔가에 흠뻑 빠져서 해보고 싶다는 열망에 오랜만에 울렁였다.
책을 받은 그날, 아이와 거실 바닥을 뒹굴면서 하루 만에 다 읽어버렸다. 입사 이후 일 배우고, 결혼하랴 임신하랴 한동안 제대로 시도하지 못했던 영어에 대한 의지가 다시 타올랐다.
사실 그동안 이런저런 영어능력 평가 시험부터 시작해서 뉴스 받아쓰기, 영화로 영어 공부하기,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와 같은 공부법까지 집적거리지 않은 게 별로 없었지만 그때까지 몇 달 이상 꾸준히 했던 공부법은 없었다. (돈도 무지하게 들었다.)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한번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오래가지는 못해도 열정이 불타면 또 그날로 시작해야 하는 냄비 같은 근성 탓에 '뉴욕 의사'가 알려주는 대로 매일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는 책들을 찾기 시작했다.
아무 책이나 시작하면 되는데 최적의 책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한동안 실패를 거듭했다. (원래 공부 안 하는 애들의 특징이지 않은가. 준비하는데 오래 걸리는 것)
어린이책은 너무 쉽고, 시험 서적은 재미가 없고, 이것저것 시도해 보니 EBS Power English가 나에게 적합했다. 그동안 영어공부는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도 끈을 놓기는 싫어서 정기구독으로 사놓은 EBS 책이 여기저기 쌓여있었다. 그중 한 권을 들고 소리 내어 읽었다.
영문 한 페이지의 본문을 이해하고, 오디오를 들으며 소리 내어 정해진 횟수대로 따라 읽는다. (나는 5번을 읽었다.)
그리고 2일차에는 다음 페이지를 이해하고 5번을 읽는다.
이때, 어제 읽었던 것까지 누적해서 어제 것 5번, 오늘 것 5번을 읽는다.
그렇게 6일간의 분량을 누적하면 하루에 총 30페이지를 소리 내어 읽는 격이다.
7일째부터는 첫날 분량을 빼고 읽어 매일 30페이지 분량을 맞추어 읽는다.
원래대로라면 10번 정도 읽어야 하지만 시간 관계상 나는 그 정도만 했다. 오디오 파일을 들으며 발음을 따라 해야 했으므로 듣기와 따라 읽기를 하다 보면 한 시간이 더 걸렸다.
아기가 있으니 한 번에 한 시간을 이어서 할 수는 없었고 틈이 날 때마다 소리 내어 읽기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한동안 그것만 했다.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도 읽고, 화장실 갈 때도 들고 들어가서 읽었다.
(엄마가 낮에 종종 아기를 봐주러 오실 때면 이때다 하고 더 열심히 읽었는데 그때마다 넌 대체 뭐하는 짓이냐고 물어보기는 하셨다.)
좀 앉아서 차분히 하면 금방 할 수 있는 분량인데 아기를 보다가 틈날 때만 하자니, 공부한 총량은 쥐꼬리만큼이면서 하루 종일 공부만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 달쯤 하고 나니 정말 문장의 구조가 좀 더 이해되는 것 같았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그동안은 규칙처럼 외웠던 문장 구조가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긴 문장을 앞뒤 독해하지 않고 한 번에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출산휴가 동안 매일 영어를 읽었더니 신기하게 걱정도 줄어들었다. 성실함에 대한 만족감으로 좋은 에너지가 얻어지는 것 같았다.
모유 수유하랴, 아기 재우랴, 아기 빨래하랴 늘 정신없었지만 틈틈이 영어를 읽다 보니 오히려 틈날 때 멍하니 있던 것보다 덜 지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