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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Apr 21. 2021

'싱글즈' 20대 추억놀이 하고 싶을 때 다시 보세요.

20대의 나와 40대의 나는

영화 '싱글즈'를 본 것은 2003년, 어느 역사작은 영화관에서 룸메이트와 함께였다.

그때 우리는 학생이었는데 마지막 상영시간 영화를 보고 밤늦게 기숙사 방에 들어가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며 수다를 떨었다.

 

난이(장진영)와 동미(엄정화)가 우리 친구들 같았고 그들의 고민이 우리 얘기 같았다.

아직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사회에 나가면 우리도 저렇게 될까, 저럴 수 있을까 실없는 소리도 맘껏 나눴다.

"야, 내 동기 남자애가 이 영화를 지 여친이랑 봤대. 근데 그 여친은 이 영화 완전 싫다고 했대."

"왜? 완전 재밌는데?"

"그니까, 그래서 난 재미없는 줄 알고 볼까 말까 했어. 걔말로는 이 영화를 남자들이 보고 여자들은 다 저런 줄 알까 봐 걱정된다고 그랬대."

"완전 '지혜'네."

정준이의 얄미운 여자친구 '지혜'


그날 영화도, 우리의 수다도 너무 즐거워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기억으로 남았다.




다시 이영화를 꺼내 든 이유는 최근 그때 영화를 같이 봤던 친구의 '충동적 사표' 사건 때문이었다.

일 중독이 아닐까 싶을 만큼 열심히 일하던 친구는 갑자기 번아웃이 되어 힘들어하더니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어느 날 아침 못해먹겠다며 사표를 냈다.

친구가 얼마나 일에 진심이었는지 알았기 때문에 오죽하면 사표를 썼을까 싶었다.

"그동안 너무 열심히 했어. 좀 쉬어도 돼."

나는 친구를 격려했고, 친구는 사표를 던진 날 꿀 같은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물론 친구는 다음날 회사에 가서 사표를 무르고 왔다.

"부장이 사과를 할 줄은 몰랐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들어가서 무슨 말을 할지도 다 적어가지고 갔는데 하나도 못했어. 아 나 뭐한 거냐."

"잘했다. ㅋㅋㅋ 다른 일 안 하기도 힘들고 하기도 힘들어. 한번 시원하게 해 봤으니 잘 됐네. 근데 그거 생각나? 싱글즈에서 장진영이 때려친다고 사표 내러 가서 '그동안 상무님을 아버님같이 여겼습니다.' 했던 거?"

"ㅋㅋㅋㅋㅋㅋㅋ 아 맞다."

낄낄거리며 카톡 대화를 마무리하고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 주 주말에 '싱글즈'를 다시 봤다.

장진영도 김주혁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워 가슴이 먹먹했다.

그래도 그들이 남겨준 싱그러운 영화는 여전히 재미있었다. 젊었던 배우들은 내 젊은 날의 친구들처럼 풋풋했고 조금 옛날스러운 대사들도 정겨웠다.



그리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참 다른 생각을 하고 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때, 2003년에 학생이었던 나는 부당한 좌천을 따지러 상무님 방에 들어간 장진영이 엄정화처럼 속 시원하게 사표를 지르지 못하는 것이 내심 답답했다.

성희롱하던 본부장을 시원하게 응징하고 나오는 엄정화는  멋있었다.

직장생활 17년 차 지금의 나는 난이의 선택이 현실적인 것을 안다. 충동적으로 사표를 쓴 친구를 응원할 수도 있지만 다시 출근해서 사표를 무르고 온 친구의 선택이 훨씬 낫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편, 극 중 '동미'는 절친이자 룸메이트 '정준'과 술을 마시다가 실수로 임신을 하게 된다.

아기를 지우기 위해 산부인과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온 동미에게, 난이는 빨리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던지 정준과 결혼을 하라고 다그친다.

그때 이십대의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동미가 정준과 결혼하기를 바랐었다.

춘천으로 떠난다는 정준을 붙잡고 임신했다고 말하고 결혼하는 결말을 원했다.


그런데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마흔이 넘어서 남편과 함께 그 영화를 보는 나는 다른 생각을 했다.

"난이랑 다시 병원에 가던지, 그게 싫으면 저렇게 혼자 아기 낳고 살아야지. 정준이랑 결혼하면 힘들지."

"뭐 정준이가 아빠긴 하니까 언제든 말은 해야 할 거고 양육비를 보태거나 같이 기르거나 하지 않겠어? 결혼은 다른 사람이랑 하더라도."

"그게 되나?"

"하긴, 애 키우면서 일하고 살다 보면 사는 게 힘들어서 정준이랑 결혼할 수도 있겠네. 애 맡길 데 없어보면 생각 바뀔 수도 있지."

중얼중얼 남편과 실없이 동미의 미래를 점쳐보며.



그런가 하면 김주혁을 따라서 뉴욕으로 가지 않은 장진영에게 그건 아니라고 열띄게 충고를 한다.

"결혼 안 하고 가면 결국 헤어지지 않겠어? 결혼을 하고 가던가. 아냐 아냐 같이 가는 게 맞지"

"아, 저건 가야지. 뉴욕 가서 디자이너 공부하고 오면 저 진상 천과장 위로도 올 수 있겠구만."

진상 천과장




나는 하나도 철들지 않고 몸만 늙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온 날들과 세상의 변화가 나도 바꾸었나 보다.

사는 게 그런 거지.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지. 현실을 직시해야지.라는 말을 자주 하고 산다.

분명한 건 변한 나의 생각과 모습이 그리 서글프지 않다는 것이다.


그날의 달콤한 즐거움이야 아련하게 그립지만, 세상을 이만큼 알고, 조금 더 현실적인 사람으로 바뀌어 있는 것은 열심히 살아왔다는 증거일 테니까.


지금 이 시간, 친구와 나는 각자의 집에서 가족을 챙기 출근 준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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