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 팟캐스트 '빨간 책방'은 들어보지 않았지만 이동진이라는 사람이 유명하다는 것은 들은 바가 있었고, 독서법이라는 제목에 끌려 가벼운 마음으로 사 보았다.
호텔로 돌아와 밤에도 읽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읽었다.
옆에서 얘기해 주는 것처럼 술술 읽히고, 책의 무게만큼이나 가볍고 상쾌해서 지금도 부산 여행을 생각하면 빨간 표지의 그 책이 연상되곤 한다.
여행지에서 읽은 책은 여행의 일부가 된다.
최근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동진의 파이아키아'가 자주 떠올랐다. 궁금해서 한두번 들어보고 열혈 구독자가 되었다.
특별히 극적이지도 않으면서 어쩜 이렇게 말을 귀에 쏙 꽂히게 잘하는 것인지 참 부럽다. 예전에 조승연 작가의 영상을 처음 보았을 때도 감탄을 했었는데 이동진 평론가에게도 비슷한 매력이 있었다.
어제는 파이아키아에 올라온 공포영화 5선 영상을 눌렀다.
사실, 나는 공포영화를 절대로 보지 않는다.
최저 수위의 영화도 후유증이 너무 커서 보지 못한다. 지금도 '여고괴담'을 생각하면 무서울 정도이다.
그나마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단체로 봐야 해서 봤다거나, 연애하면서 분위기에 취해 얼떨결에 본 것들까지 합해도 몇편 되지 않는다.
'식스센스', '령', '데스티네이션' 중 한편, '마이 리틀 아이', 정말 딱 이 정도 본 것 같다.
그중 김하늘 주연의 '령'은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전 직장 언니들과 함께 봤는데 다들 실망스럽다면서 욕을 할 때 나는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귀와 눈을 막고 있어서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특히 '데스티네이션'과 '마일 리틀 아이'는 끌려가다시피 가서 봤는데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무섭다.
아무튼 이렇게 공포영화 공포증이 있지만 공포영화가 주는 매력은 알고 있다. 기발한 상상력과 창의적인 스토리는 다른 장르가 줄 수 없는 즐거움을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걸 좀 즐기며 보지 못하는 내 멘털이 원망스럽다.
그래서 공포영화는 못 보지만 웬만한 영화 스토리는 대부분 안다. '링'이나 '주온'같은 일본 공포 영화가 한창 유행하던 때 내용은 궁금한데 볼 용기는 나지 않아 영화를 본 친구를 붙잡고 몇십 분씩 줄거리를 들으며 직접 보는 것보다 더 긴장하기도 했었다. 요즘은 좀 재밌다는 공포영화가 나오면 블로그를 뒤져서 줄거리를 읽는 즐거움만 만끽한다. 유튜브 클립을 보는 건 아직 무서워서 못하겠다.
어제 유튜브에서 우연히 본 '이동진을 기절시킨 외국 공포영화 5선'도 이런 이유로 눌러보게 되었다.
영화 트레일러는 무서워서 못 보지만 평론가가 공포영화를 얘기해 주는 것은 그리 무서울 것 같지 않고, 결정적 장면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한번 보기로 했다.
역시 이동진 평론가의 설명은 감칠맛이 났다. 영화의 구체적인 내용도, 무서운 장면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도 없었지만 영화를 기대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소개한 영화는 '캐빈 인 더 우즈', '디센트', '드래그 미 투 헬', '유전', '28일 후' 이렇게 다섯 개였다.
역시나 다섯 개의 영화에 대한 평을 재밌게 듣고 나서 내린 결론은 '내가 볼 수 있는 건 하나도 없군.'이었다. 폐쇄 공포증까지는 아니지만 답답한 것은 잘 못 보니까 '디센트'는 안 되겠고, '드래그 미 투 헬'과 '28일 후'는 잠깐씩 보여주는 클립도 무서워서 안되겠다. 죽은 엄마의 유령과 대립한다는 '유전'은 설정만으로도 우울하고, 그나마 '캐빈 인 더 우즈'는 깜짝 놀라기만 하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지만 아마도 누군가 잔인하게 죽을 것 같아서 볼 수가 없다.
어떤 것도 보지 못하지만 끊임없이 공포영화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는 나는 공포영화를 딱 이 정도의 수위로만 소개해주는 이 유튜브 영상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공포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찾아서 보고 싶을 만큼 맛깔난 설명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나 같은 공포영화 모지리들을 위해서, 기발하고 획기적이지만 너무 무서워서 보기 힘든 결정적 장면을 그냥 적당히 묘사만 해주는 영상이나 글이 있다면 열심히 찾아서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나도 공포영화를 즐기며 여름을 보내는 용감무쌍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운동선수가 되고 싶다는 바람만큼이나 다음 세상에서나 가능한, 요원한 욕심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