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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Mar 11. 2022

[마루 밑 아리에티] 소인들의 디스토피아

할 일은, 주어진 하루를 살아내는 것

주토피아의 치류 마을처럼 경쾌할 것 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분리된 세계 정도는 존재할  알았다.


영화지구에서 인간과 공존하는 소인들의 이야기다.

생존에 불리한 조건 때문에 지구 상에 일정 기간 존재했다가 사라져 간 수많은 생물종이 있다.

소인들 역시 '작은 몸'이라는 불리한 조건 때문에 멸종되어 가는 중이다.


아리에티와 부모님은 이제 세상에 소인들은 자신들밖에 남지 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설령 남아있다 해도 그 수는 극히 적다. 작은 체구로 인간과 큰 생명체들 사이에서 사는 것은 위험하고 힘들다.


소인을 직접 보지 않은 인간들은 그들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소인의 존재를 들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위험하다. 그래서 소인들은 늘 숨어서 다니고, 자신들의 존재가 발각되지 않도록 극도로 주의한다.

하지만 단지 크기만 작은 나약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 이들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간들의 물건을 몰래 가져다 쓴다. 그들은 그 행위를 '빌려 쓴다'라고 표현한다.


생필품이 떨어지면 아버지는 인간의 집으로 가서 물건들을 빌려온다. 

어느 날 아버지는 아리에티를 데리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마루 위의 인간 집으로 물건을 빌리러 간다. 제 아리에티도 자기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이 필요한 나이다.

인간의 집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창문까지의 높이, 벽돌과 벽돌 사이의 바닥이 뚫려있는 공간, 쥐와 벌레와 고양이 같은 생물들, 모든 조건이 소인들에게는 생명을 걸고 넘어야 하는 장벽이다.

아버지를 따라 처음 빌리는 일을 하러 간 아리에티는 이 위험한 과정들을 통과하며 각설탕을 얻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티슈 한 장을 빌리던 도중 '쇼우'라는 인간 소년에게 모습을 들키게 된다.

쇼우는 아리에티 가족이 숨어 살고 있는 집주인의 손자이며, 심장 수술을 앞두고 있는 몸이 좋지 않은 소년이다.


아름다운 그림이 처연해 보일만큼 소인들의 삶은 위태롭다.

친척들은 두더지 같은 큰 동물들에게 잡아먹히거나, 다양한 이유로 생명을 잃었고, 소인을 발견한 대부분의 인간은 그들을 보호하지 않고 이용하거나 해쳐왔다. 그래서 인간에게 모습이 드러난 소인들은 바로 거주지를 옮겨야 한다.

이 집에도 소인들을 잡아내려는 시도를 하며 아리에티 가족을 곤경에 빠뜨리는 가정부가 있다.

소형 인간이라는 존재는 큰 인간에게 돈벌이가 되거나, 미물들처럼 다뤄도 되는 존재로 비쳤을 것이다.


아리에티를 발견한 소년 쇼우는 이들을 지켜주고 싶어 한다. 

쇼우의 집에서 소인의 존재를 본 사람은 쇼우만이 아니다. 먼 옛날 소년의 증조할아버지도 소인을 본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언젠가 다시 그들을 만나면 선물하기 위해 호화로운 인형의 집을 준비해 두었다.

쇼우는 그들에게 그 인형의 집을 선물하고 싶다.

모든 인간이 사악한 것은 아니다. 쇼우나 쇼우의 할머니처럼 소인의 존재를 신비스럽게 생각하며 보호해 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듯이 영화 속에서도 선인과 악인이 있다. 그러나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은 통상적인 인간의 기준이다. 소인에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도, 기준을 만들 여유도 없다.

소인에게 인간은 모두 기피해야 하는 위험물이다.




그들은 그들법칙대로 살아내야 한다. 

이즈음에서 나는 아리에티의 가족이 그 아름다운 인형의 집으로 들어가, 쇼의 보호를 받으며, 설탕이나 빵 등을 빌리지 않고 편안한 여생을 보내는 행복한 결말을 상상한다. 

그러나 소인들에게 지구는 그렇게 안락한 곳이 아니다. 이미 종족의 대부분을 잃었고 자신들의 생명도 매일 위협받는 이곳은, 그들의 디스토피아다.


쇼우라는 한 명의 인간에게 기대어 인형의 집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 애완 인간이 되는 것, 그것은 삶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언제 가정부 아주머니 같은 악당이 나타나 자기들을 해칠지 모른다. 인간의 눈요기거리가 되거나, 예측하지 못한 존재들로 인해 끔찍한 결말을 맺게 될 수도 있다.



비록 인간에게 '빌리는' 행위를 하며 생을 유지해야 하지만 어차피 사는 것은 스포츠가 아니다. 생존을 위한 행위이고, 소인들과 인간들 사이에서 도덕심은 평형을 이룰 수 없다.


결국 지구 상의 수많은 종족이 멸종되었으며, 당신들도 그들처럼 사라져 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쇼우의 충고에 아리에티는 맞선다. 살아남을 것이라고.

아리에티어떤 구체적인 미래를 말하지 않았다. 살아남아서 종족을 찾아가 후손을 번식할 것이라거나 소인만의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지도 않다.

그저 살아 있으니 이 삶을 유지하는 것이 숙명이라는 듯, 담담히 살아남겠다고 말했다.


내일을 알 수없지만 주어진 삶에 용감하게 맞서는 아리에티를 보며 쇼는 기운을 얻는다. 

심장 수술을 앞두고 자포자기했던 쇼에게 삶을 대하는 아리에티의 태도는 생명의 불씨가 되었다. 


쇼우와 작별인사를 한 아리에티는 가족과 함께 인간이 만들어 놓은 도구인 주전자에 몸을 싣고 또 다른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떠난다.

다시 새로운 곳에서의 정착을 준비하며, 주전자 안에서 살림도구들을 점검하는 아리에티와 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오래 생각했다.

사는 것에 대하여, 삶의 의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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