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네이프 교수가 악당이 아니라는 사실은 해리포터를 끝까지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안다. 그렇다면 해리의 아빠 제임스는 착한 사람일까.
심심하면 한 번씩 아이와 해리포터 영화를 돌려본다. 봐도 봐도 재밌는 건 아이도 나도 마찬가지이다.
영화를 다시 보면 디테일에 집중하게 되는데 대사 하나하나의 의미가 마음에 와 닿는 것을 보면 해리포터가 명작인 것은 확실하다.
지난 주말에 '불사조 기사단'을 다시 보면서 있었던 일이다.
해리가 볼드모트에게 생각을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 스네이프 교수로부터 훈련을 받는 장면이었다. 덤블도어 교수의 부탁으로 해리를 훈련시키지만 해리를 보며 그의 부모가 동시에 떠올라 애증을 느끼는 스네이프 교수는 훈련 중에도 독설을 내뱉는다.
"너하고 블랙은 삶이 불공평하다고 끊임없이 징징대지. 아직 모르나 본데 삶은 원래 불공평해. 네 애비 덕분에 뼈저리게 느꼈지."
"훌륭한 분이었어요."
"비열한 인간이었어."
안 그래도 좋아하지 않는 스네이프 교수가 자꾸 생각을 읽으며 아버지를 모욕하자, 화가 난 해리는 역으로 스네이프 교수의 기억을 읽어 버린다. 그리고 스네이프 교수가 어린 시절 해리의 아빠와 그의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해리의 아빠와 그의 친구들은 홀로 있는 스네이프에게 다가가 바지를 벗기려는 모욕을 준다. 영화에서는 이 장면에서 끝났지만 책에서는 실제로 바지를 벗기기도 하고, 그 장면을 해리의 엄마가 보게 되기도 했던 것 같다. 슬프게도 스네이프는 해리의 엄마인 릴리를 영원히 사랑했다. 제임스의 괴롭힘 때문에 스네이프와 릴리의 사이가 어긋나긴 했지만.
"해리 아빠가 학폭 주동자였구만."
삐딱한 자세로 소파에 올린 한쪽 다리 무릎 위에 팔을 걸치고 오징어를 씹던 아들이 그 장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들의 말에 '해리 아빠가 나쁜 사람이네.'라고 간단히 동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책으로 읽으면서도 충격적이었고 끝까지 찜찜하던 장면이었다.
저 상황에서 해리 아빠는 당연히 나쁜 사람이다. 인기 있는 학생으로서 친구들과 무리 지어 다니며 내성적인 성격의 스네이프를 괴롭혔다. 그뿐만 아니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모멸감을 주는 폭력을 가하기까지 했다.
지금 같았으면 성인이 되어서도 학폭 미투를 당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럼 해리의 아버지는 악인일까?
해리가 이 사실에 대해 혼란스러워할 때 시리우스 블랙인지 리무스 루핀인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누군가가 해리에게 '당시에 그들은 어렸고 장난이 심했다'는 정도의 설명을 해주었던 것 같다.
그 정도로 해명이 되는 걸까?
정의롭게 볼드모트에 맞서 싸웠고, 모두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기억하는 해리의 아빠는 왜 스네이프에게 그렇게 모질었을까? 스네이프와 릴리의 사이를 질투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도 연적을 그렇게 응징하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일까?
한편, 스네이프 교수는 과거에 잠시 볼드모트를 숭배했던 자였다. 볼드모트를 숭배할 때는 악인이었으나 착한 편으로 돌아섰으니 그는 최종적으로 선한 사람일까? 아니면, 그것도 릴리에 대한 사심 때문이었고, 말포이의 지속적인 나쁜 짓을 은근히 응원하는 선생이었으니 역시 나쁜 사람의 편에 속하는 걸까?
과연 순간순간의 행동으로 선과 악을 정의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혼란스러웠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면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가 되는 일들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었던 적이 있고, 어떤 경우 상대방은 그로 인해 평생 회복되지 않는 상처를 가지고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선이고 어느 정도 나빠야 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과거의 나쁜 짓이 누군가에게 치명적이면 '악'이고, 운 좋게 큰 타격을 주지 않았다면 미숙한 시절의 잘못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인가.
문득 어렸을 때 기억이 났다.
많은 아이들이 잘난 척을 하는 한 친구를 둘러싸고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한때는 나도 친했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 서서히 멀어져 나도 그 친구의 행동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을 때였다. 그날은 무슨 이유였는지 작정이나 한 듯이 다 같이 그 친구를 공격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나는 그 친구와 좋았던 날들 때문에 괴롭기도 했고, 따박따박 자신의 상황을 변명하는 친구가 밉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 친구의 잘못이 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생님이 예뻐하는 친구였고 그로 인해 아이들의 질투를 사는 것이라는 걸 설명하기는 힘들었지만 어슴푸레 인지하고 있었다. 다수의 편에 서 있던 나는 그 친구의 편을 들어줄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특별히 못된 것도 아닌 친구가 왜 조금 더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굴며 인심을 얻지 못하는 것인지 답답했다.
그 말을 하고 싶어서 비난하는 아이들 사이에 끼어들어 한마디를 거들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너를 예뻐하시잖아. 선생님이 예뻐하는 사람은 미움받을 수 있기는 해."
"그래서 뭐? 선생님이 예뻐하는 게 내 잘못이야? 그걸 어쩌라고?"
그게 억울하다면 아이들에게 조금 더 친절하게 구는 게 좋겠다는 다음 얘기는 하지 못했다. 말주변이 없어 조리 있게 말할 수도 없었고, 따지고 드는 그 친구의 말이 맞는 말이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린아이들의 싸움이라 별 결론 없이 그럭저럭 무리가 흩어지고 나도 그 후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그때의 내가 참 비겁했고, 그때 내 마음이 시켰던 건 그 친구의 편을 들어주는 쪽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곤 한다.
누군가 물어본다면 나는 나대로 변명을 할 것이다. 그 아이의 행동이 잘못된 부분이 있었고, 다수가 불만을 가졌으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며 나도 나대로 상처 받은 부분이 있어서 그랬다고.
하지만 찜찜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결국 해리포터의 아빠에 대한 생각은 정리가 되지 않아 아들에게 한번 더 물어보았다.
"해리포터 아빠는 착한 사람인 거 같애?"
"아니."
"그럼 나쁜 사람?"
"아니, 철든 사람. 나중에 철든 사람."
"아, 그러네 나중에 철들어서 정의로워졌나 보다. 근데 스네이프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잖아. 그건 어떻게 생각해?"
"뭐, 불행한 삶을 살긴 했지. 근데 해리 아빠가 죽어서 속 시원했을 거야."
(음, 이건 의외의 답인데. 그게 벌은 아닐텐데, 가혹한 걸)
"그럼 용서받는 건가?"
"몰라, 나 카톡 왔어. 봐야 돼."
아직 열두 살 아들과의 대화는 이 정도가 한계인가 보다.
가끔 악의 힘을 이용해서 절대 선을 이루는 영웅의 이야기를 통해, 어디까지가 정의인지 생각하게 하는 영화들도 있다. 결국 정답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주제들이 끊임없이 다뤄지는 것이겠지만 아이와 대화를 하다 보면 답을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자꾸 정의를 내려 보려고 한다.
그러나 부모도 완벽한 인간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인간은 성찰을 할 테니 부모라고 해서 자식에게 매번 정답을 줄 수는 없다.
입장과 상황에 따라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므로, 늘 객관적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쪽에 서자고 하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나이가 좀 더 들면 카톡 온 것을 보고 나서도 나랑 더 얘기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사춘기가 되면 아예 얘기 상대를 안 해줄 것 같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