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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May 11. 2021

거봉용용을 푸는 시간

수학 좀못 한다면 디딤돌

올 초에 친구를 만나 초등학교 5학년이면 이 정도는 풀어야 한다는 문제집 리스트를 전해 들으며 망연자실했다. 3학년때 방학숙제로 풀어야 했던 수학 문제집 2권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문제집을 풀어본 적도 없으니 수학이 반타작인 것이 이해가 갔다.


사줘봤자 분명 풀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시도하지도 않았었지만 그래도 사줘보기는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인 것 같아서 5학년이 되자마자 가장 인기 있다는 디딤돌 초등수학 기본 + 응용을 사줬다.


"으~악. 문제집이 너무 두꺼워."

"온라인 수업하면서 수업을 잘 못 들으니까 문제집을 같이 풀면서 해보자. 이제 5학년이니까 문제집 한 권 정도 풀어야 돼."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며 문제집을 건네줬지만 아들은 예상대로 들춰보지도 않았다.


차근차근 한 장씩 풀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실천이 되지 않아 며칠이 흘렀는데 우연히 책상 위에 문제집을 보니 제목이 변신해 있었다.

수학 좀 못한다면 디딤돌
쵸똥수학 거봉 + 용용
5-110


"이게 뭐냐? 엄마가 기본 + 응용 사줬는데 왜 거봉용용 됐냐?"

"ㅋㅋㅋㅋㅋㅋㅋ 내가 바꿨어. 그리고 '수학 좀 한다면' 왜 문제집을 풀어~. 수학 좀 못하니까 풀지."

혼을 내야 하나 싶었지만 이미 웃음이 터져버렸고, 봐도 봐도 웃겨서 한참을 웃었다.


그러고 나서도 지난달까지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다가 내리 재시험을 보는 꼴을 보니 뭐라도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학교 수업에서 어디 배워?"

"약분"

"수업 들으면 이해가 가?"

"하나도 모르겠어"

(울화가 치민다.)

"그럼 오늘부터 엄마가 저녁에 설명해 줄테니까, 설명에 해당하는걸 매일 한 페이지만 풀어."

"아~~~~~너무 많아."

"수업도 잘 듣고 숙제도 잘하는데 시험을 매번 재시험 보는 건 좀 억울하잖아. 그리고 재시험 보고 나서 다시 풀어보면 이해 가잖아. 그건 더 억울하지 않아? 어차피 공부할 거 미리 하면 되는데 시험 잘 보는 거 좋지 않아?"

재시험 보는데 스트레스가 있던 아들은 어느 정도 수긍을 했다.


지난주부터 시작한 아들과의 수학 공부는 순탄하지는 않았다.

약속을 안 지켜서 한참씩 잔소리도 하고 저녁에 못한 부분을 같이 하기도 하면서 간신히 4페이지의 진도를 뺐다.

어제저녁,

"거봉 용용 하자."

"아~~~ 지겨워."

"빨리 하고 자자. 이거 한번 풀어봐."

배웠다는 부분인데 어쩌면 이렇게도 모르지? 나도 5학년 때 이렇게 수학 못했나? 치미는 부아를 꾸역꾸역 억누르면서 설명을 해주니 한 문제를 풀어 보인다.

"오~ 못 풀 줄 알았더니 이문제를 푸네. 너 수학 잘하네."

"아냐, 못해."

"야, 너 공부 그렇게 안 해놓고 지금 몇 달 만에 처음 공부하는데 이 정도 풀면 잘하는 거지. 소질 있는 거야."

(뭐지, 이 정도 칭찬에 저 우쭐한 표정은. 생각보다 잘 먹히네)

"엄마, 이거 앞에 이렇게 써 있잖아. '수학 좀 한다면 디딤돌' 그러니까 이거 수학 좀 하는 애들이 푸는 거야. 좀 어려운 거야."

(농담이야, 진담이야. 저 표정 봐서는 진담인 거 같다.)

"어 맞어. 그러니까 틀리고 어려운 게 당연한 거야. 모른다고 짜증 낼 필요가 없어. 다 아는 문제집은 풀 필요가 없어. 시간낭비야. 모르니까 풀지."


공부하기 싫고 모르면 고분고분하기나 할 것이지, 이해가 안 가거나 풀어놓은 문제가 틀리면 짜증을 내는 아들을 보면서 나도 같이 화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통 힘든게 아니다. 화낼 사람이 누군데!


"엄마가 너 무슨 연습 해야 한다고 했지?"

"틀리는 연습."

"그래, 틀리는 것도 연습해야 돼. 다 맞으려고 하면 아무것도 못 배워. 틀려야 모르는 게 뭔 줄 알지. 그런데 이제 한 가지 더 연습해야 돼.

엉덩이 붙이는 연습! 네가 너~무 공부 안 해서 한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적어. 내일부터 문제집을 푸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엉덩이 붙이는 연습을 해. 딱 문제집을 펴고 한 문제를 풀어. 그게 목표야. 그래야 그다음 문제를 풀 수 있어."

"ㅋㅋㅋㅋㅋㅋ 엉덩이 연습."


얘가 내 말을 듣고 있는 건지.

하~아.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이 속 터진다는 눈빛을 보내며 몰래 한숨을 쉰다.


사실 나는 수학을 잘하지도 못했고 수학 공부는 남편이 훨씬 잘 가르친다. 그러나 남편은 아들을 붙잡고 공부를 시작하면 부글부글 끓는 화를 참는 역량이 나보다 좀 떨어지는 편이라 초등학교 때는 내가 가르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속 터지긴 나도 마찬가지지만 장난만 치고 있는 아들과 옆에서 속 터지는 모션을 취하는 남편을 번갈아 보고 있자니 웃음밖에 안 나온다.


"그리고 문제집 답지는 엄마가 가지고 있을까? 혹시 답지가 뒤에 있으면 보고 싶은 마음을 이기기 힘들어?"

"아니, 괜찮아. 난 별로 관심 없어서 안 봐."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매일 만들어내며 아들과 시작한 '거봉용용'공부는 당분간 계속될 예정이다.

오늘은 그래도 두 문제는 풀어놓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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