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밥을 뽑으러 와서 아프다고 하도 울어대 결국 다음 주에 다시 오기로 한 아이의 엄마가 속상해하는 장면이었다.
아이가 미워서 저녁 먹으러 같이 가지도 않았다는 말이 너무 이해가 됐다.
내 자식이지만 미워서 보기 싫을 때도 있다.
12살은 사춘기 전조증상을 보일 때인지 아들이 짜증도 늘고 마찰도 잦아졌다.
참 하찮아서 지나고 보면 어이없는 사건들이지만 그 순간이 자주 찾아오니 피로가 쌓인다.
뭐 이런 것들이다.
"엄마, 나 도넛이랑 우유 먹고 싶어."
"그래, 아 근데 우유 없어. 다 떨어졌어."
"힝~!"
"주스랑 먹어."
"씷~어!!"
문 닫고 쾅!
"엄마, 속옷이 없어."
"아 그래 큰 거 다 빨았어. 오늘만 옛날 거 입어."
(작은 속옷 입느라 고개를 숙이다가 의자에 머리를 박았다.)
"이것 때문에 머리 부딪쳤잖아!"
문 닫고 쾅!
인간대 인간으로서 나도 화가 나서 지나가는 애 등짝을 후려치고 싶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화가 나는 것보다 더 큰 감정은 서운함이다.
이제 퇴근하면 엄마를 외치며 달려드는 것도 조금 덜하고, 주말에 딱 달라붙어서 놀자고 하는 일도 드물어졌다. 친구들과 카톡도 하기 시작했고, 만화도 혼자서 보고 싶어 한다. 예전에는 게임하면서 있었던 일이나 게임 스토리 얘기만 해서 듣기 싫었는데 이제 그마저도 잘해주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말도 잘 붙여주지 않는다는 사춘기가 거의 다 와가는 것 같다.
전에 어떤 상담 프로그램에서 '언제쯤 착하고 귀여운 우리 딸로 다시 돌아올까요?'라며 사춘기 딸아이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던 부모 얘기를 들었다. 그 물음에 서천석 선생님이 '안 돌아옵니다. 그 아이는 이제 없어요.'라고 답변해서 웃었던 기억이 나는데 이제 내가 그 단계를 겪고 있나 보다.
가끔 춤 한번 춰달라면 지나가면서 엉덩이를 한 번씩 흔들어주고, '엄마랑 있으꺼야!' 라며 혀 짧은 소리도 내주던 아들은 이제 기억 속 그 자리에 잘 두고 현재의 아들과 살아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최근 이런 생각들 때문에 조금 기운이 빠졌었는데 오늘 아침 드라마에서 울보 아이를 보며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 힘든 암 치료를 잘 견뎌준 아들이라도 실밥도 못 뽑게 애를 먹이면 미워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엄마도 사람이니까. 그래도 극 중에 유연석이 말한 것처럼 아이가 가장 아픈 것을 잘 알고 힘든 일을 다 견뎌주었는데 그까짓 실밥 뽑느라 힘들게 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겠는가.
삼 개월 간격으로 뇌수막염이 두 번이나 와서 무슨 다른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지 MRI를 찍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때 마취약을 먹고 몇 시간을 내리 자는 아이를 보면서 다른 건 다 관두고 무사히 잘 자라서 빨리 어른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간사해서, 아픈 아이가 낫고 나면 이내 그런 바람은 잊힌다.
그저 종일 게임 생각에 머리가 꽉 차있는 아이를 보면 울화가 치밀어 꼴도 보기 싫어지고, 감정 정리 못 하는 걸 볼 때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성격으로 자랄까 봐 걱정이 태산이다.
늘 아플 때를 상상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겠지만 지금 애먹이는 것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각성하는 것은 아이와 즐겁게 사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좀 무던하고 덜 예민한 아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 때 급히 고개를 젓는다.
가끔 아들이 '엄마는 왜 요리 못해?'라고 물을 때마다 '너 왜 엄마를 다른 엄마랑 비교하니? 난 네가 그대로 좋은데.'라고 반박하지만 사실 '좀 덜 예민하면 좋겠다' 고 생각하는 것도 다른 아들과 비교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어제도 늦게까지 아이언맨을 열심히 봤으니 늦잠을 잘 것이 분명한 아들은 일어나자마자 '심심해'를 연발하며 게임 시간이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릴 것이다.
그래도 건강하고 아직은 가끔 귀여운 짓도 해주는 아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지. 순두부찌개 성공률 70% 밖에 되지 않는 엄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아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