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초등학생을 응원하며.
지금을 즐겁게 사는 그들에게 박수를
"엄마, 학교에서 선생님이 애들한테 카드를 주면서, 뽑아보라고 하셨어. 거기에 시간이 써 있는데 자기가 뽑은 시간만큼만 살 수 있다면 뭘 하고 싶은지 말하는 거야. 근데 어떤 애가 '10분'을 뽑았다. 그래서 10분 지나고 나서 애들이 '야, 너 이제 죽는 거야' 막 그러면서 놀렸어."
"헉, 10분은 진짜 너무하다. 그래서 그 친구 10분 동안 뭐 한대?"
"잘 생각 안 나. 애들이 놀린 것만 생각나. 흐흐."
"흐흐, 뭐야~. 근데 너는 뭐 뽑았어?"
"나는 3일."
"아. 그래? 그래서 3일이라면 뭘 할 거야?"
"어. 하루는 가족들이랑 함께 있을 거고, 다음날은 그동안 못 해본 거 다 해볼 거고, 마지막 날은 마스크 벗고 돌아다닐 거야. 마지막 날이니까 코로나 걸려도 상관없잖아."
"하... 그 상상 속에서도 코로나가 존재하는 거야?
근데, 코로나는 걸려도 며칠 있어야 아프기 시작해. 그러니까 이틀째 날부터는 벗어도 될 거 같아."
"진짜?"
일어날 리 없는 그 세계 속에서도 코로나가 존재하는 것이 안쓰러워,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을 주었다.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오면서도 씁쓸했다.
코로나 때문에 당연한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 미안하다는 어른들도 많은데,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그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미안함은 아닌 것 같다.
바다 쓰레기에 집게발이 묶인 꽃게나, 페트병 찌꺼기에 걸린 채로 자라나 허리가 잘록해진 거북이의 사진 같은 것을 볼 때는 인간 집단의 한 사람으로서 분명한 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아이들에 대한 감정은 그저 내가 누렸던 많은 즐거움을 모른 채로 삭막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에 대한 연민 정도라고 하면 적당할까.
그나마 우리 아이는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이라 코로나 이전에 소풍도 가보고 운동회도 해보았으니, 초등학교가 주는 즐거움을 만끽해본 편이다. 지금의 1, 2학년들은 입학식도, 한 반 아이들이 다 같이 가는 소풍도, 운동회나 합창대회의 경험도 없을 것이다. 더 어린아이들은 유치원에서 가는 소풍조차도 못 가고 있으니 이 시기가 길어지면 소풍이 무엇인지를 책으로나 보고 알 수 있지 않을까, 슬픈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만이 그것을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이니까, 모르고 사는 자들은 지금의 모습이 당연한 채로 이 세계를 살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옛날에는 눈이 오면 막 퍼먹을 수 있었다'며 과거를 회상하는 부모님 세대의 말을 듣고, 환경이 깨끗했다는 말인 것은 알겠는데, 눈을 퍼먹는 게 뭐가 좋지?라고 생각했던 나처럼 말이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한쪽 귀에 매달린 마스크를 한두 살 많은 언니가 허겁지겁 달려와 채워주는 것을 보았을 때 어른인 나는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어쩌면 마스크를 채워주는 언니나, 마스크를 한 채로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서글픈 것은 그 시절을 그렇게 보내지 않았던 어른들만이 느끼는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학교에 매일 가고, 놀이터에서 뒤엉켜 마음껏 뛰어놀고, 친구들 집을 들락날락 거리는 사소한 것들조차도 할 수 없지만, 온라인 수업 중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다가 선생님께 소리 차단을 받고 낄낄대는 아이들을, 다 같이 모여 시끄럽게 떠드는 대신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 수다를 떠는 아이들을, 못하는 것들을 아쉬워하기보다는 지금 재밌는 것들을 찾아서 하루를 잘 살아 내고 있는 아이들을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