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앉아서 양촌리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중 하나였다.
초등학생인 내가 그렇게도 전원일기를 좋아하고 챙겨봤던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김회장네 세 고부의 정겨운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 아빠는 5남매 중 막내였지만 위로 가장 큰 누님을 제외하고 중간 형제들이 모두 어린 시절에 세상을 떠났다. 아빠가 두 살 때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맏딸과 막내를 데리고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셔야 했다.
의지할 데가 없어 그랬는지 할머니는 당시 유행하던 이상한 종교에 빠지셨다. 남편을 대신하여 할머니의 삶을 유지시켜 주던 존재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종교는 할머니와 우리 엄마 사이를 가로막는 가장 큰 갈등의 요인이 되고 말았다.
홀어머니의 외아들에게 시집을 온 우리 엄마는 안 그래도 힘든 살림에 할머니의 종교 강요까지 받아야 했고, 결국 한 집에서 20년을 같이 산 할머니와 매일 갈등을 겪으며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사실, 엄마도 할머니 못지않게 고집이 센 사람이라 두 사람의 고부간 갈등 때문에 우리 집은 별로 화목한 가정에 속하지 못했다. 나는 이런 이유로 불행하다고까지 할 건 없지만 정서적으로 꽤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낸 편이다.
전원일기의 김회장댁 고부관계는 늘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조용하고 인자한 정애란과 생각 깊고 다정한 김혜자, 고분고분 시어머니와 잘 지내는 고두심을 보면서 우리 집도 저러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그 생각이 내 안에 깔려 있어서인지 나는 절대로 고부갈등으로 인한 불화를 내 자식에게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신혼 초에 어머니로부터 스트레스를 받던 당시에는 나 자신이 제일 중요했기 때문에 남편에게 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자주 울기도 하고 화도 내곤 했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나니 아들에게 내가 겪은 불안정함을 물려주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다.
또한 시어머니라는 존재가 남편의 엄마이고, 아들의 할머니라는 것은 바뀔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남자와 여생을 보내면서 그의 어머니를 안 보고 살거나 미워하기만 하고 사는 것은 불행 하나를 짊어지고 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시어머니 대응, 마음관리 전략
그렇다고 모든 것을 인내하고 털어버리기에는 내 그릇이 턱없이 작았다.
어머니와 일생을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규칙이 필요했다.
앞으로도 어머니와 한 집에서 살 생각은 없다. 아직까지 같은 집에서 살아갈 자신은 없지만 나중에 거동이 불편하실 때가 오면 옆집에 모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만날 때마다 웃는 얼굴로 뵐 것.
그러기 위해 한 번의 만남 시간을 4시간 이하로 유지할 것.
경험상 행복 유효시간은 4시간이 적당하다. 만나서 안부를 묻고 밥을 먹고 간단한 대화 후 4시간 안에 헤어지면 행복하게 돌아설 수 있다.
물론 명절 때는 예외이니 특별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명절은 하루를 어머니 댁에서 묵어야 하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명절을 잘못 보내면 후유증이 다음 명절까지 간다.
먼저 순식간에 집중이 될 수 있는 소설책을 준비한다. 그래야 잠들기 전에 하루를 곱씹지 않고 바로 책에 빠져들 수 있다.
그리고 시간 날 때마다 밖으로 나와 산책을 한다. 어머니댁은 주변에 한적한 산책로가 많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공격이 들어올 때 무슨 핑계를 대서든 황급히 집을 빠져나와 산책을 해야 한다. 머뭇거리다가는 응급처치가 늦어져 심각한 내상을 입을 수 있다.
황당무계한 요리법을 목격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대로 참고 보고 있다가, 두 눈을 가리고 '그만! 이제 그만!' 을 외칠 것 같은 바로 그때도 물건을 산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와 산책을 하고 들어가야 한다.
생각 없는 말씀 공격이 테러급으로 강할 때에는 나도 침착한 말대꾸로 어느 정도 방어를 한다. 화를 내면 버릇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므로 나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져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어렵지만 가장 효과적인 조근조근 따지기 전술을 구사해야 한다.
끝으로 무사히 명절 프로세스를 마치고 어머니와 작별인사를 하고 나온 직후를 주의해야 한다.
어머니댁을 나서서 차에 올라타 남편의 얼굴을 마주 보는 순간, 잠자고 있던 공격력이 깨어나 강하게 시비가 걸고 싶어 질 수 있다. 이때 방심하면 남은 명절 연휴가 어색함과 후회로 얼룩지게 된다.
그때 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쇼핑몰 어플을 연다. 그리고 '찜' 해놓은 목록에 들어가 평소에 살까 말까 망설이던 사치품 종류를 장바구니에 넣고 배송료도 따지지 않고 시원하게 결제해 버린다. 오래 망설였던 물건일수록 더 큰 통쾌함을 맛볼 것이다.
시댁에 다녀와서 계속 좋지않은 감정이 되새김질 될때는 될수 있으면 서점같은 곳에 가서 잠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 내가 속해있던 원래의 세상으로 나와 문명의 광선을 마음껏 쪼여주면 어머니 댁에서 드리워진 어둠이 사그라드는 효과를 보게된다.
요정도 해주면 비교적 성공적으로 명절 방어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컨트롤되지 않는 감정으로 고민하던 끝에, 나는 화를 마음에 담아 놓지 않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어머니가 나를 홀대하실 때는 "어머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 서운해요."라고 말씀드렸다.
친정 엄마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시면 "어머니, 어머니도 저 사람 외할머니 생각하면 눈물 나신다면서요, 저도 그래요. 저도 엄마가 저희 애 봐주시고, 살림해주시느라 늙으시는 거 보면 가슴 아파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해요." 라고 말한다.
그렇게 그때그때 내 마음을 보여주면 어머니에게 대한 나쁜 감정들이 옅어진다. 어찌 보면 반대로 어머니 마음속에 서운함이 쌓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남은 생을 어머니와 척을 지고 살 것 같았다. 그건 싫었다.
어머니가 내 반응에 불같이 화를 내신다면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며 풀어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이문이 남지 않을 싸움 따위는 하지 않으시는 분이었다. 역시 내가 하수였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좀 되바라진 말이다 싶을 만큼 강하게 말씀드리면
"우리 딸덜은 뭐시라고 하면 '네, 어머니~' 그랬다."
라는 정도로 불만을 내비치셨다. 내가 보기에도 형님들은 순하고 말씀도 온화하게 하신다. 그런데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을 어쩌겠는가.
"저는 잘 못 그래요. 저희 엄마한테도 그렇게 잘 못하겠어요."
생각 없는 말씀으로 보이지 않는 표창을 날려서 내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는 하지만 그 말씀에 반박하는 나를 찍어 누르지는 않는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어머니에게 내 언짢은 기분을 표현할때마다 마음이 썩 편한것은 아니지만 나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화해는 안돼도 이해는 하는 관계
남편이 가족이 되고, 남편의 가족과 익숙해지고, 그의 가족과 나를 연결해주는 자식을 낳고 기르면서 어머니도 나의 가족이 되었다. 가끔 떠오르면 아직도 손이 부르르 떨릴 만큼 화가 나는 기억들도 세월 속에 닳고 달아 모서리가 뭉툭해졌다. 미워서 자주 보고 싶지 않았던 양반이지만 이제는 어디가 아프다고 하시면 걱정이 된다.
지난해 어머니는 높이 있는 물건을 꺼내러 의자에 올라가셨다가 떨어져 바닥에 머리를 찧으셨다. 통증이 있으셔서 병원에 갔더니 뇌 안에 피가 조금 고여있다고 했다.
의사는 경과를 지켜봐야한다고 했다.
머리를 다쳐 집안에 누워계시던 어느 날. 주말에 어머니를 찾아뵈었더니 얼굴이 반쪽이 되어 계셨다. 기운이 하나도 없고, 근육은 다 빠져서 움직이기도 힘들어하셨다.
가슴 깊숙이 어머니에 대해 앙금같이 남아있던 분함과 짜증이 스르르 흐트러지는 것 같았다.
노인이시다. 이제 정말 연세가 많이 드셨구나.
한달후 검사결과 다행히 출혈양이 많지 않았고, 다행히 수술 없이 고인 피가 말라 회복이 되셨다.
늘 건강하시던 어머니가 편찮으셨을때 남편의 걱정이 많았다. 결코 효자라고 할 수 없고 어머니를 만나면 성질만 부리던 사람이었지만 어머니의 사고 소식에 사색이 되었다.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병으로 잃었을 때 남편은 가슴이 휑했을 것이다.
그런 남편을 보며, 어머니만은 그 독특한 경쾌함을 지키시면서 남편곁에 오래오래 머물러 있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올봄 어머니 생신에는 코로나 때문에 형님 가족들과 다 같이 모이기 힘들었다.
우리 가족만 따로 가서 가까운 식당에서 밥을 먹고 어머니 댁에서 TV를 보았다. 지루하기도 하고 집에 가고 싶어 멍하니 앉아 있는데 어머니가 한숨 자라고 하시며 방구석에 쑤셔 박혀있던 이불을 끄집어내셨다.
그와 동시에 이불 아래로 후드득 뭔가 덩어리들이 떨어졌다.
"어머니? 저거 뭐예요?"
"잉~ 표고버섯, 말려야 쓴다드먼. 따순데 두고 말려야 써."
틀린 말은 아니다. 말린 표고버섯을 조금 더 바짝 말리기 위해 뜨뜻한 아랫목에 달력 같은 것을 깔고 그 위에 널어놓는 것은 많이 보던 장면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방구석에, 정확히 말하면 장롱과 침대 사이 약 30cm 정도 되는 공간에 아무것도 깔지 않은 채로 먼지와 함께 표고버섯을 굴려놓고 그 위를 이불로 꾹 덮어 놓는 것이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 메주나 청국장을 띄우는 거라면 모를까.
이불 사이에서 우르르 떨어지는 표고버섯을 보고 어이가 없어 온 가족이 한참을 웃었다.
그렇지. 그래야 우리 어머니지.
당신이 맞다고 생각하면 앞 뒤 안 가리고 밀어붙이는 저 성격 덕에 지금까지 힘든 세월 잘 버티셨을 것이다. 상대방에게 두 번 생각 않고 아무 말씀이나 막 하시는 저 불도저 같은 성향이 자식 넷을 데리고 살아 내는데 장점은 되지 않았겠는가.
좋은 게 좋은 거다.
가족이니까 더 그렇게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야 하는 일도 많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 어머니로부터 불시에 습격을 당할 것이고, 그때마다 나만의 방식으로 방어하고 치유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 명절 때마다 어처구니없는 음식들을 만들며 서로의 요리 실력을 조금도 발전시키지 않은 채로 세월을 보낼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지금까지 겪어온 바를 종합해 볼 때 어머니가 나를 미워하지는 않으시는 것 같다. 아니, 솔직히 어머니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두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실 때 나는 좋아하는 카테고리에 간신히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속 편하다.
어머니는 늘 나의 두 카테고리 경계에 있다.
어떤 날은 좋아하는 쪽, 어떤 날을 싫어하는 쪽.
지난 십 년간 잊어버릴만하면 한 번씩 내 속을 뒤집어 놓으시던 공격의 빈도도 눈에 띄게 줄었다. 전에 없이 내 눈치를 보시는데 그것도 어째 승리감이 느껴지지 않고 속이 불편한 것이 오히려 짜증스럽다. 차라리 기세 등등하실 때가 분통은 터져도 마음이 편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다시 당하면 또 뒤로 넘어가겠지만)
이제 유쾌한 어머니를 뵐 때면 피식피식 웃음도 나고 저런 모습으로 오래오래 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복지관 할매들 다 내가 이겨묵어부러~!"
복지관에서 탁구를 배우시는 어머니는 강건한 팔힘으로 같은 반 학우 분들을 모조리 이기고 오신다. 너무 잘 치셔서 당신이 인기 최고라고 하셨다.
나와 남편은 그 얘기를 듣고 한바탕 토의를 했던 적이 있었다. 어머니의 독설을 친구들이 안 좋아할게 분명한데 저 말씀이 사실일까 미심쩍었다.
토의 결과, 한두 번의 랠리도 불가능한 노인들 사이에서 근육질 어깨로 스매싱을 내리칠 수 있는 할머니란 희소성 있는 연습 파트너일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필요에 의한 친구들이 많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역시 사람은 기술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
어머니에 대한 현재의 감정은 용납이나 화해 같은 종류의 것은 아니다. 굳이 뜻을 맞춰 본다면 '이해' 정도가 될 수 있겠다. 그 시절을 살아온 어머니의 입장에서 어머니의 현재 상황을 이해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은 할 것이다.
다행히 어머니는 아직 건강하시고, 나도 어머니의 해괴한 음식과 특이한 생활패턴을 떠올리면 웃음이 새어 나오는 정도의 애정은 생겨났으니 앞으로 남은 날들도 어머니와 지지고 볶으며 그런대로 유쾌하게 이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어머니는 내 삶을 이루는 다양한 조각 중 하나이다.
한때는 모나 있던 그 조각이 이제 삶의 다른 부분과 적절히 어우러져 앞으로의 나날이 편안하게 흘러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