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어머니가 미울때를 꼽아보자.

어머니와의 흑역사 Top 3.

by 춘춘


좋을 때도 있었지만 미울 때가 더 많았다.

우리 어머니가 좋은 시어머니냐고 묻는다면? 양심적으로 그렇다고는 못하겠다.

어머니는 단순하고 명쾌하지만 그런 점이 듣는이의 심정을 생각하지 않는 무신경함으로 발동할 때가 많다. 이런 저런 이유로 상처받았고 가끔은 화가 나서 몇날 며칠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앞으로도 어머니는 그러실 것이고 그런 어머니가 정기적으로 미울 예정이다. 다시 보고싶지 않을 만큼 미울때도 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니 나도 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한다.

어머니도 내가 맘에 안 들 때가 많으시겠지 뭐. 시집온 지 십 년이 지나도 주방보조에 머물면서 당신의 모자란 부분을 전혀 채워줄 생각도 안 하는 며느리니까. 사근 사근하지도 못하고 기분 상하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는 내가 어머니도 못마땅하실거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달랜다.


그래도 어머니에게 서운했던 점을 딱 세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여기서라도 속풀이를 해야 앞으로 남은 인생 어머니와 잘 지낼수 있는 아량이 생길것 같기 때문이다.




첫째는 '돈'이다.


결혼하면서 어머니는 당연히 궁합을 보셨다. 다 괜찮고 아들도 낳을 거라는 말에 안심은 되셨다지만 돈이 좀 샌다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어쩌까, 돈이 샌다는디, 나가 느그 돈 관리를 해줘야 쓰까?"

"어머니~.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해요. 그리고 그런 거 믿지 마세요."

이것이 우스개 소리 하듯이 남편이 전달해준 궁합에 대한 어머니와의 대화였다. 조금 황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남편이 잘 대처해 주어서 다행이다 싶었고, 그 일은 '올해는 물가에 가지 말란다.' 정도의 가벼운 어른들 말씀으로 생각하고 넘어갔다.


결혼 후 어머니를 2주에 한번 정도 찾아뵀는데 갈 때마다 늘 빼먹지 않고 하시는 말씀이 '돈 아껴 쓰라'는 말이었다.


꽃게가 제철이라 어머니와 함께 쪄 먹으려고 사 가지고 가도

"요런 것 다~씨는 사지 마라~잉. 돈 아껴서 집사야제."


휴가에 여행을 한번 갔다 와도

"여행 갔다 왔냐~. 자주 가지 마라~잉. 내가 살아봤시야~. 애들 공부 갈쳐야제. 집 사야제. 돈 아껴 써라~잉"


어머니댁 프라이팬 코팅이 다 벗겨져 철 조각이 튀어나올 정도가 됐길래 새로 한 세트 사다 드렸을 때에도

"있는디 뭘 또 샀냐~. 고맙다. 나가 요런 것을 안 버려야. 너도 돈 아껴 써라~ 잉."


어머니를 만날 때마다 반복해서 들려주시는 '돈 아껴 써라~잉' 이 지긋지긋해서 환청이 들릴 지경이었다.


결혼 후 첫 생일을 며칠 남겨두었을 때의 일이다.

"어머니, 이번 주에 OO 생일이에요."

얘깃결에 남편이 무심코 내 생일 얘기를 꺼냈다.

"그러냐~. 나가 사위 생일이고 메느리 생일이고 모린다. 요로고 정신이 없어야."

"괜찮아요. 저희끼리 맛있는 거 사 먹을게요."

"비싼 거 먹지 말아야~!"


첫 생일상은 시어머니가 차려주시는 경우도 많이 있던데 혹시라도 어머니가 그런 부담을 가지시지 않을까 하는 야무지고 어리석은 걱정도 했었다. 그러실 필요 없다고 말씀드려야겠다는 멘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참으로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좀 많이 서운해서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동일한 강도로 울화가 치민다.


아무튼 돈에 대한 섭섭한 에피소드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어머니는 인생에서 돈에 대한 아쉬움이 컸고 워낙 아끼며 살아오신 분이라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에 관해서는 그냥 넘어가기로 결심을 했었다.


그런데 쿨하게 넘어가기로 했던 그 마음이 배배 꼬이게 만든 것은 우리가 구입한 아파트 사건이었다.

어머니는 당신이 젊은 시절 장만해 놓으신 아파트 덕을 톡톡히 보고 계신 터라 자식들에게도 노후 자금으로 월세를 받을 수 있는 아파트를 사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셨다. 조기교육이란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남편도 젊었을 때 좋은 자리에 있는 아파트를 사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고, 나 또한 이 시대를 사는 직장인으로서 사업을 할 생각도 없으니 집이라도 미리 사두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꽤 입지가 좋은 아파트를 눈여겨보게 되어 우리는 전셋집에 살면서도 빚을 내고 전세를 껴서 그 집을 구입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집과 돈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으셔서 집 때문에 나를 피곤하게 하실 것이 분명하니 당분간 이 일은 비밀에 부치기로 했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곧 어머니께 말씀을 드릴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부터 어머니의 태도가 바뀌신 것이 내 심사를 뒤틀리게 만든 이유이다.


먹을 것을 사 드려도, 어머니 선물을 사 드려도, 아주 저렴한 생활 용품을 사드려도 늘 버릇처럼 하시던 돈 아껴 쓰라는 말씀이 싹 사라지셨다.

나를 볼 때마다 내 이름인 듯 불러대시던 '돈 아껴 써라~잉'이 온데간데 없어진 것이다.


그것을 인지하고 얼마 후 나는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에게 나는 "돈이 새는" 며느리였던 것이다. 그런 게 왜 그제야 알아지는지.

점쟁이가 '이 며느리 아들도 낳고 괜찮은데 돈이 새'라고 했으니 내가 돈을 쓸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아리셨겠는가. 분명히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아들의 돈'이 눈에 보이는 듯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나도 집을 못 사는 것이라 생각하며 속앓이를 하셨는데 당신 예상을 웃도는 아파트를 샀으니 이제 팔다리 뻗고 주무실만하신 것이었다. 내 짐작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 남편에게 허심탄회하게 물어봤더니 사실은 내게 직접 말씀은 안하셨지만 그동안도 돈을 아끼지 않아서 집을 못사는 것 아니냐는 언질을 지속적으로 남편에게 해오셨던 눈치다.

(사실 이 부분에서 남편의 공감을 얻고싶어 '허심탄회'한 척 했을 뿐, 내 마음은 꼬일대로 꼬여있었다.)

어차피 어머니의 '돈 아껴 써라' 멜로디는 '예, 아끼고 있어요.'로 응대하며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그것이 나의 사주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약이 바짝 올랐다.


따지고 보자면 이제 돈 아끼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아파트 샀다고 잘했다고도 하시니 아주 평화로운 결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뒤끝 하나는 남부럽지 않은 내 성격상 마음 저 안창에 쌓여있는 앙금은 아직까지도 가끔 슬슬 일어나서 내 입을 삐죽거리게 한다.




두 번째는 '며느리 대접'이다.

이건 그래도 어디선가 들어본 일들이라 당황스러움은 덜했다. 아니, 어쩌면 어머니를 만나서 겪은 다른 에피소드에 비해 일반적이어서 내성이 생겨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편과 결혼을 하기로 하고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어머니와 아버님의 인상이 좋았다. 우리 부모님처럼 소박해 보이셨고, 두분이 쓰시는 전라도 사투리가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를 연상시켜 친근감이 일었다.

나는 그날 꽃을 화기에 담아 갔는데 어머니가 그걸 받으시고,

"꽃이 아가씨 맹키로 이삐구만." 하셔서 내가 마음에 드시나 보다 싶어 기분이 좋았었다.

저녁을 잘 먹고 후식으로 포도도 먹고 나니 늦었다며 이제 가야 하지 않겠냐고 하셔서 일어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지하철 타고 가도 되제? 늦었응께."


대사가 좀 이상하지 않나? 늦었으니까 아들한테 차로 데려다주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게 아니면 "지하철 타고 가도 되제? 아직 이릉께."라고 해야 앞뒤가 맞는 것 같았다.

처음 뵙는 시어머니 자리가 하시는 말씀이라 "네~" 했지만 서운함이 목구멍에 탁 걸렸다.

인사를 하고 혼자 걸어 나오는데 푸대접을 받은 것 같아서 눈물이 차 올랐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내 옆으로 남편 차가 섰다. 남편이 급히 차를 몰고 따라 나온 것이다.

"미안해. 미안해."

지금 같으면 폭풍처럼 원망을 쏟아부었을 텐데 그때는 서러운 마음에 남편을 붙잡고 한참을 울기만 했다.

그래도 내가 남편을 참 좋아하긴 했나 보다. 그 일 때문에 결혼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으니 말이다. 어머니의 그 말씀은 그 이후 수십 년간 뒷골을 당기게 만들 수많은 이상한 멘트의 전초전이었는데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뭐, 알았어도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모른 척 넘어갔을 것이니 할 말은 없다.

아무튼 그 일 후 불행히도 갑자기 아버님이 돌아가셨고, 그로 인해 충격을 받으신 어머니의 다양한 이상한 말씀을 상황상 그러려니 이해하며,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 후 어머니를 찾아뵐 때마다 어머니의 말씀이 상처가 되었다. 토요일에 어머니를 뵙고 오면 수요일까지 흔적이 남아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기가 일쑤였다.

한동안은 그럴 때마다 남편과 싸웠는데 좀 지나고 보니 손해인 것 같았다. 당신은 악의 없이 던져 놓고 쾌청하게 잊으시는데, 나 혼자 마음이 다쳐서 남편까지 힘들게 하고 분노의 나날을 보내는 것이 억울했다.


그래서 내가 세운 전략은 참거나 잊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서운함을 말씀드리는 것이었다.

가벼운 것 몇 가지를 예로 들어 보겠다.

명절 점심에 가족들 상을 차리는데.

"괴기 많이 안 구워도 되겠쟈? 남자들 상에만 놓으면 됭께."

아. 조선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어머니! 저 고기 엄청 좋아해요."

"잉? 글믄 다 구워 삐리라."


아기가 자라서 혼자 밥을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어머니는 내 밥에 아이 밥을 얹어서 아이와 내 밥을 한 그릇에 퍼 주셨다.

"애기는 엄마랑 같이 묵으면 되제?"

"아~니요. 저는 저 혼자 먹을래요. 아이 밥 따로 풀게요."


그래도 요정도 항의가 통하시는 것에 감사하며 나도 먹고 싶은걸 당당하게 요구하는 정도로 말대꾸 업그레이드 했다.




세 번째 '어머니 미워요' 카테고리는 우리 엄마, 즉 친정엄마와 관련된 전형적인 '시어머니 독설'이 되시겠다.

이 일은 지금 생각해도 어깨가 축 늘어질 만큼 힘들었던 일이라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아직도 평균 3개월에 한 번씩은 의지와 상관없이 곱씹어지는 일이라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아기를 낳고 나서 우리는 친정엄마에게 육아를 부탁하기 위해 친정 옆집으로 이사를 왔다. 하나밖에 없는 귀남이 아들이 처가 옆집에 사는 것이 어머니 마음을 불편하게 할 것이 당연했지만 어머니는 아기 봐 주실 마음이 없다고 하셨으니 야근이 잦은 우리로써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손주를 보기는 싫으시고, 사돈이 아기를 봐주는 게 좋긴 한데 그 옆에 아들 며느리가 사는 것도 싫으시고, 며느리가 맞벌이하는 건 좋으시고, 이런 복잡 미묘한 감정으로 뒤섞인 어머니의 마음은 질풍노도와도 같았으리라.

사실 어머니는 잔 짜증이 없으신 분이시다. 갑자기 성질을 버럭 내는 다혈질 우리 엄마에 비해 꽤 감정관리를 전략적으로 하는 분이시다. 당신 좋으실 대로 생각하셔서 남들 뒷목을 잡게 하실지언정 언성을 높이거나 기나긴 잔소리를 하지는 않으신다.

그래서 대화중에 평온한 분위기가 유지되지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씀,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시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돌진하여 상대방을 기암 하게 만드는 매우 독특한 특징이 있는 분이시다. 당신 마음은 홀가분하고 상대방 마음에는 전쟁이 일어난다.


그날도 그랬다.

어머니를 찾아뵌 주말, 동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애처로운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시던 어머니.

"어째 울 아덜이 얼굴이 꺼먼것이 많네. 피곤헌가?"

"아니에요."

"피곤하먼 그라제. 장모 옆에 살아서 긍가?"

이건 무슨 마른하늘에 수류탄 투척인가.

"하~ 엄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장모 옆에 살다가 병난 사우도 많어. 따로 살믄 안되것는가?"

"그럼 애는요? 장모님이 애 봐주시니까 옆에 살지. 그리고 장모님도 힘들어요."

"애는 느그 장모네 두고, 너거 둘이 나와 살믄 안되냐?"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복창 터지는 말씀을 하시는 건 으레 있는 일이라 그러려니 하는데 이번엔 난이도 상, 강도 최강의 것이 나왔다. 설마 내가 바로 옆에 있는 게 안 보이시나?

당황스럽고 창피한데다가 나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있다가 집에 갈 때 나랑 싸울 일이 겁나기도 했을 남편의 표정에는 온 세상 번뇌가 다 들어있는 것 같았다.

나는 대꾸할 기운도 없고 남편이고 어머니고 다 꼴 보기 싫어서 밥만 퍼먹고 있었고, 서슬이 퍼렇게 소리치는 남편의 기세에 눌려 그날 어머니는 더는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 일이 있은 후 너무 속이 상해서 우울한 며칠을 보내고 있는데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원래 전화를 잘 하지 않는 분이시라 혹시 미안하다고 하시려는 건가, 그렇다면 사과를 어떻게 받아야 하나, 벨이 울리는 몇 초간 오만 생각을 다했는데.


"아야~, 울 아덜 위해서 니가 회사 그만두문 안되긋냐? 나는 너 편하라고 한테 안 산다. 너 위해서 허는 말이다. 장모 옆에 살믄 사우가 힘들어야~ 니 남편 병나믄 쓰겄냐 ...... "


역시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다. 주말에 아들이 난리를 피워 다 못 끝낸 말을 나한테 하려고 전화를 하신 것이었다. 내가 드라마 작가라면 아침 드라마에 쓰고 싶을만큼 창의적인 대사들이 이어졌다.


"어머니, 저 사람 얼굴 검은 건요. 골프 치러 다녀서 그래요. 장모가 애 봐주니까 속 편하게 골프 치고 운동 다니느라 얼굴 타서요. 그리고 애 봐주고 밥 해주는 우리 엄마가 힘들지 저 사람이 왜 힘들어요?"

그날 나는 마음에 담아두었던 모든 말을 울며 불며 쏟아 부었다. 분하고 서러워서 손이 덜덜 떨렸고 그럼 아이 키울 동안 남편을 그쪽으로 보낼 테니 데리고 계시라는 말까지 했다.

그리고 전화를 어떻게 끊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남편에게 바로 상황을 설명했고 그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고집으로 평생을 버틴 분이니 아무리 귀한 아들의 얘기라도 듣지 않았고, 남편도 평생 그게 힘든 사람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로 했고 나는 마음이 풀릴 때까지 어머니를 뵙지 않기로 했다.

그 후로 한동안 그 생각만 하면 속이 답답하고 눈물이 났다. 안 그러기로 했지만 남편에게 똑같은 일로 반복해서 화를 냈고 지친 남편도 더이상 나를 달래지 않으면서 서로를 힘들게 했다. 화내고, 사과하고,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날들이었다.


결코 어머니를 쉽게 다시 뵙지 않을거라고 다짐했지만 두 달이 채 못되어서 설날이 다가왔다.

명절에 어머니를 찾아뵙지 않음으로써 화가 단단히 났다는 것을 보여주기엔 내가 그렇게 강단 있는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화를 내고 있는 것도 피곤하고 명절에 가지 않아서 형님들과의 관계가 어긋나는 것도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결국 '사는 게 그렇지 뭐'를 중얼거리며 설날 어머니를 찾아뵀다.


어머니는 역시 보통 분이 아니었다. 반갑게 손주를 안으시는 모습이 너무 해맑았다.

약간의 어색함으로 내 눈을 피하기는 하셨지만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담담하신 모습이 미워서 어머니가 돌아서실 때마다 어머니 뒤통수에 대고 눈을 흘겼다.


근데 그래 봤자 소용없었다. 내가 어머니 댁에 발을 들이면서 이미 냉전은 끝났고 어머니는 그 일을 입밖에도 내지 않으셨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예의 그 이상한 명절 음식을 만들며, 입을 약간 내밀고 세 번에 한 번쯤은 묻는 말에 대답을 떼어먹는 정도로 복수를 마감해 버렸다.

한번 무너진 냉전을 다시 시작하는 것도 불가능하여 나의 시위는 그것으로 시시하게 끝이 나버린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