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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Aug 29. 2021

글쓰기, 꼭 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쓸수 있게 되기까지.

가끔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건가 싶을 때가 있다.

대학 졸업을 한 한기 앞두고 도저히 전공 관련 업계에는 취직이 안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고 졸업 후 단기 계약직을 전전하는 선배들의 하소연을 듣자니 마음도 심란하여 도피성으로 대학원에 입학을 했다. 어느 날 밤 자려고 이불 깔고 누워있던 부모님은 갑자기 졸업을 앞둔 큰딸이 안방으로 쳐들어와 대학원에 합격했으니 학비를 좀 대 달라고 하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다.

없는 살림이라도 자식은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세대 부모님이신지라 취업해서 시집갈 밑천을 모을 줄 알았던 딸에게 또다시 학비를 대 주시긴 했지만 그 속이 답답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도 딱히 월급 많이 주는 회사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취업난은 점점 심해지고 대학원까지 졸업해 놓고 전공과 상관없는 업계에 갈 수는 없어 연구원이라는 타이틀은 달고 가는 계약직 직원으로 입사를 했다. 월급은 적었으나 오래 다녀도 계약이 해지되지는 않는 안정적인 계약직이라는 말로 부모님을 안심시키고 그럭저럭 회사를 다녔지만 마음속에 틀어앉은 나 자신에 대한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규직 직원으로 나보다 높은 연봉을 받고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기도 싫고 나만 도태되는 것 같아 직장에 다니면서도 늘 잡코리아를 헤매다니는 것이 하루 일과의 마무리였다.

잘릴 염려는 없으니 시집가기 전까지 회사를 잘 다니면 좋겠구먼 한동안 열심히 회사를 다니는가 싶더니 조금 더 좋은 회사로 옮겨보겠다고 연차를 내고 종종 면접을 보러 다니는 딸이 불안하신 부모님은 말리지도 못하고 '그냥 열심히 다니지 왜 고생이냐...'라며 중얼거리기만 하셨다.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보니 머리맡에 아빠가 앉아서 내 머리를 쓰다듬고 계셨다.


"힘들지? 네가 이제 나이가 많아서 다른 회사에서 안 뽑아줘. 그냥 지금 다니는데 착실하게 다녀."

"아니, 스물아홉이 뭐가 많아! 될 거야!"


버럭 화를 내긴 했지만 나도 그 생각을 매일 하고 있었던 지라 더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고 앉아있는 아빠 얼굴을 보고 있자니 불쌍하고 이래저래 서러웠다.

그래도 그렇게 쑤시고 다닌 덕에 적당한 중견 기업으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은 것은 그 일이 있은 며칠 후였다.


"아빠! 내가 할 수 있다고 했잖아. 나 취직했다고!"


부모님께 기쁜 소식을 전달하는 마음과 더불어 느껴지는 통쾌함은 상황에 적절치 않게 '복수'와도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들어간 회사를 십여 년 다니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 아이를 또다시 부모님 손을 빌려 기르며 엄마 아빠 옆에서 치대고 살다 보니 마흔이 훌쩍 넘어버렸다.


그런데 이제 염치없게도 못다 한 꿈이 이뤄보고 싶어졌다.

나는 원래 글 쓰는 것을 좋아했는데, 고등학교 때도 국어 점수가 훨씬 높았고, 백일장에서 상도 받았는데, 취직 안된다는 말에 이과 간 거잖아?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대학 다닐 때도 글 쓰는 게 좋아서 문예창작과 교양이란 교양은 무조건 다 찾아들었다. 매 시간마다 A4용지 한 페이지 이상 글을 써오라는 숙제가 재미있어 한 장이 아니라 서너 장씩 써가서 교수님이 그 많은 교양 수업 학생 중 내 이름도 기억할 정도였는데 왜 그 후로는 글을 쓰지 않았던 걸까?

이제 와서 후회가 됐다. 문학계에 있지 못하더라도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왜 혼자서 글쓰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강원국 작가님이 글쓰기 책을 내지 않아서 매일 글을 쓰라는 말을 들을 구석이 없어서였던 걸까.

그때는 작가가 될 것이 아니라면 글을 쓰는 것은 아무런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연애하고 술 먹느라 바빴고, 그 후에는 취직하고 이직하느라 정신없었고, 또 회사 다니면서 살아내느라 30대는 훌쩍 보내버렸다.


이제야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매일 일기도 쓰지 않은 지난 세월이 아까워졌다.

그냥 하고 싶은 말을 써봐야지. 이것저것 다 써봐야지. 나도 쓰면 잘 쓸 수 있을 거야. 이제라도 해보자는 마음에 블로그도 시작하고 브런치도 시작하면서 늦깎이 작가 놀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글쓰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 그랬지. 그때 문예창작과 교양수업 숙제하면서 글쓰기가 재미는 있었지만 내가 쓴 글이 형편없다고 생각했고, 수업시간마다 교수님이 작품 해석을 해주실 때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해석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문학하는 사람들과 사고체계 자체가 다른가보다 낙담하며 더 이상 그쪽은 넘보지 말자고 포기했었지. 기억이 났다.


지금이라고 그때보다 나아진 것은 없지만 이번에는 그냥 버텨 보기로 했다. 어디다 돈을 내고 써야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학점을 안주는 것도 아니고, 많이 읽혀서 사회적 반향을 고려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나 하고 싶은 말을 매일 쏟아내도 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난 봄에 내 전공과 관련된 저널에서 관련 업계 종사자들에게 글을 연재할 기회를 주는 모집공고가 났었다.

어떤 내용이던 직종이나 학문과 관련하여 글을 연재해보라는 공고를 보고 냉큼 지원을 하여 몇편을 연재하게 되었다. 글을 올릴 때마다 원고료도 몇만 원씩 주는 일이라 나는 생전 처음으로 '원고료'라는 것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석 달에 걸쳐 연재를 마감하고 원고료를 받았다. 식구들과 밥 한번 먹으면 다 써버릴 적은 돈이었지만 너무 소중해서 입금 화면을 캡처해 놓고 플래너에 '첫 원고료 받은 날'이라고 기록도 해놓았다.

어디다 말하기는 부끄러워 남편에게만 얘기했는데 왠지 엄마에게 자랑이 하고 싶어 져 넌지시 엄마한테만 말을 해 보았다.


"엄마, 나 원고 쓴다. 이것 봐, 그동안 이 사이트에 글 올리고 돈 받았어."

"얼마 받는데?"

"15만 원"

"아이고 그것밖에 안 줘?"


회사에서는 나보다 늙은 사람이 많지도 않을 만큼 나이가 먹었고, 사춘기 아들을 둔, 중년 애 엄마가 무슨 칭찬이라도 두둑이 받고 싶었던 건지, 왜 엄마의 그 말에 그렇게 서운했는지 모르겠다.

엄마의 눈빛에 자랑스러움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글을 쓴다는 말에 놀랍기도 하고 안 그래도 피곤하다고 하면서 뭘 돈도 안 되는 그런 걸 한다고 힘을 빼냐는 안쓰러움이 묻어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소리를 하는 엄마가 미워서 입을 삐죽거리는 나를 한치 떨어져 바라보자니 한심스러움에 웃음이 피식 나왔다.


뭘 그걸 칠십이 넘은 엄마한테 인정받고 싶어서 자랑을 하고, 또 칭찬 안 해준다고 실망을 하고 있나.

참 나이를 어디로 먹었나 싶다.


내가 미치게 하고 싶던 일을 밥벌이하면서 틈틈이 할 수 있고, 한두 사람이라도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걸로 감지덕지할 것이지 말이다.

아들에게 늘 남과 비교하지 말고, 결과에 실망하지 말고, 어제의 나와 비교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라고 하는 말을 나한테 한번 더 읊어보면서 주말 넋두리를 마무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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