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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Sep 07. 2021

강철멘탈을 갖고 싶어

대범한 척 살고 있지만 사실 내 속은 이렇게 하찮아.

친구에게서 전시회를 한다는 연락이 왔다.

취미로 시작한 캘리그래피를 전시회에 참여할 만큼 열심히 했나 보다. 남편과 함께 가보기로 했다.


전시회 당일날 꽃집에 들르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모처럼 꽃다발을 사려니까 내가 받는 것처럼 은근히 설렜다.


그런데, 꽃집 앞에서 문득 드는 생각에 걸음을 멈췄다.

'공동 전시회라던데 본인의 비중이 너무 작은 건 아닐까.'

'혹시 아주 작은 규모라서 꽃다발을 주는 것이 조금 과하게 여겨지면 어쩌지?'

'사진으로 보니까 친구 작품이 한두건 밖에 없던데, 나도 친구도 민망한 상황이 되면 어쩌지?'

들어갈까, 말까 몇 번을 고민하다가 결심했다.

'그래, 사자. 아무도 꽃이 없으면 어때. 친구가 좋아하면 되지.'


요즘은 마른 꽃도 섞어서 넣고 들풀처럼 수수하고 시크한 꽃들도 많이 팔던데 역시 동네 꽃집이라 그런지 장미나 소국 같은 고전적인(?) 꽃들이 꽃 냉장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시내에 나가서 살 껄 그랬나?'

'아니야, 가서 꽃집을 못 찾으면 어떡해. 그냥 가까운 데서 준비해 가자.'


국화 종류는 너무 가라앉은 느낌이고 조금 새로워 보이는 신종 꽃들은 잎이 여린 것들이어서 전시장에 종일 놓여있으면 금방 시들어 버릴 것 같았다.

심심하지만 연분홍 장미가 아직 다 피지도 않은 작은 송이 채로 싱싱하고 단아해 보여, 장미로 하기로 했다.


그런데 장미를 두 단을 살까, 단을 살까.

석단을 사려고 보니 꽃다발이 너무 크다. 석단이면 그 꽃가게에 있는 분홍 장미를 모두 넣어 주신다는데 그러면 꽃다발의 지름이 40센티미터가 넘는 크기가 된다.

'안 그래도 공동전시회에 가져가는 꽃인데 너무 과한 거 아닌가? 보통 TV 같은 데서 전시회를 보면 꽃 한두 송이로 만든 미니 꽃다발을 그림 옆이나 아래에 살짝 붙여놓는 센스 있는 모양이던데, 내 꽃이 너무 무식하게 커 보이는 게 아닐까?'

'아니지, 그래도 기왕 사가는 거 풍성하고 탐스러우면 보기 좋잖아? 더구나 장미가 이렇게 자그마한데 좀 크면 어때?'

'아냐 아냐, 안 그래도 꽃이 너무 올드한 느낌인데 꽃다발까지 20년 전 졸업식처럼 큼지막한 건 너무 촌스러. 살짝 무심한 사이즈가 좋겠어.'


이랬다가 저랬다가 머릿속이 복닥복닥.

몇 분간 수십 회의 혼자 대화 끝에 작은 꽃다발로 하기로 했다.

들풀 같은 보라색 꽃도 좀 섞고, 유칼립투스 커다란 잎도 넣어야 예쁘다는 꽃집 사장님 말씀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손님이 많지 않은 꽃집이라 사장님이 포장지와 리본을 바꿔 대 주면서 포장도 정성껏 골라 주셨다.

요즘 나오는 꽃 포장처럼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불투명한 흰색 포장에 베이지색 리본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하나씩 하나씩 높이를 맞춰 꽃을 놓고, 포장지를 여러 겹 겹쳐  반짝이 철사로 묶고 계시는 사장님 손길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어째 또 꽃이 적어 보인다.


'아, 그냥 석단을 하는 걸 그랬어. 너무 빈약해 보이잖아. 포장지가 너무 커 보이는 것이 괜히 돈 아낀 거 같아. 사장님께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여기서 포장을 중단하고 장미 한 단 더 넣어 달라고 할까? 그래도 꽃값이 올라가니까 사장님도 귀찮기는 하지만 좋으실 거야.'

'아닌가? 그래 봤자 만원 더 넣는 건데 사람 참 귀찮게도 한다고 생각하실까?'


아까 다 끝낸 줄 알았는데 머릿속에서 다시 시작됐다.

그러고 있는 사이 사장님은 솜씨 좋게 꽃다발을 다 만들어서 내 앞으로 내밀어 보이신다.

"예쁘죠?"


다 만들고 보니 괜찮아 보인다.

"그러네요. 말씀하신 대로 리본도 잘 어울리네요. 감사합니다."

꽃을 들고 거울로 보니 색깔도 모양도 예쁘고 크기도 적절해 보인다.

'괜히 고민했네. 역시 내 판단이 맞았어.'


꽃다발을 들고 가게를 나와 차에 탔다. 하늘도 맑고 모처럼 만지는 꽃다발도 예쁘고 기분이 좋았다.


차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 그림자에 비치는 꽃이 예뻐 사진을 찍어보았다.

아, 그런데 중앙에 꽃송이 두 개가 비어있다. 시들었던 송이가 있었는지 머리가 잘린 자국이 가운데에 딱 보인다.

꽃이 적어서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아까 사장님이 마지막 포장을 할 때 다시 해달라고 했어야 됐어. 그냥 한단을 더 샀어야 됐어. 역시 꽃이 너무 적어 보여. 더구나 가운데에 꽃송이가 잘린 자국이 너무 잘 보이잖아?'

 

파아란 하늘 아래로 자동차는 기분 좋게 달리는데 내 머리는 꽃 한 단을 더 샀어야 하나 하는, 하나마나한 고민으로 복잡해지고 있었다. 다시 돌아가서 한단을 더 살 것도, 다른 가게에 들어서 꽃다발을 다시 만들 것도 아니면서 세상 쓸데없는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여보, 꽃이 좀 적지 않아? 너무 초라해 보여?"

"괜찮은데?"

"꽃이 좀 비어 보여, 여기 송이가 잘린 것도 있어."

"아니야~ 아까 여보가 들고 나올 때 딱 좋아 보였어. 예뻐. 더 큰 건 좀 너무 커."

이 정도면 슬슬 피곤하게 몇 차례 물어볼 것을 눈치챘는지 남편이 시원하게 대답해 준다.


"그래, 이 정도면 됐지. 너무 커도 안 어울릴 거야. 장소가 좁을 수도 있는데."

마음을 정리하고 부서질 듯 눈부신 가을 햇살을 즐기며 전시장으로 향했다.




전시회는 고즈넉한 한옥 스타일의 미술관에서 열렸는데 나름대로 규모가 있었다. 아주 큰 곳은 아니지만 분위기가 아늑하고 꽤 많은 작가들이 모여서 전문가스러운 작품들을 전시한 곳이었다.

그냥 잠깐 배운 거야,라고 했던 친구의 말은 지나친 겸손이었다. 흔히 보는 좋은 글귀를 적어놓은 캘리그래피를 넘어서 그림과 자작시가 풍성한 전문가 수준의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그 안에 들어가 친구 얼굴을 한번 보고 주변을 둘러본 나는 내 꽃다발에 대한 집착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남편도 거들었다.

"야~ 작품 밑에 꽃바구니 가져다 놓은 사람들도 많네. 여보 말대로 우리 꽃다발이 좀 작다. 큰 거 살걸 그랬다."

약간의 아쉬움을 담아 가볍게 던진 남편의 멘트는 아까 어렵게 정리한 내 고민의 호수에 던져 돌멩이였다.

"그치? 맞지? 아~ 그럴 것 같더라니."


'아무리 봐도 꽃다발이 너무 작은걸. 내 꽃다발이 제일 작은 거 같아. 석단을 사는 거였어.'

다른 작가들은 활동을 오래 해서 그런지 방문객들이 커다란 꽃바구니를 몇 개씩 놓아준 작품도 있는데 내 친구는 초보 작가라 그런지 작은 꽃 한 송이와 내 작아 보이는 꽃다발이 전부였다.


"야~. 뭘 여기까지 왔어. 차 안 막혔어? 너무 고마워~."

오전 중에 방문한 것이라 사람이 많지 않아서 친구와 한참 얘기할 수 있었다. 곁다리로 참가한 거라고 말은 했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해서 커리어를 쌓아갈 계획을 언뜻 내비치는 친구가 참 좋아 보였다.

손재주가 좋아 이런저런 일을 잘하는데 이 일도 꾸준히 해서 좋은 직업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내 꽃다발이 너무 작아. 저것 봐. 다른 사람들은 바구니가 있어."

못 참고 말해버렸다.

"야~ 무슨 소리야. 나 꽃 선물 처음 받아봐. 우리 신랑은 꽃을 안 사준다."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꽃 선물 처음 받아보다는 한마디에 아침 내내 들락날락했던 민이 눈 녹듯 사라졌다.

'얘는 어쩜 이렇게 말을 예쁘게 하나. 주는 사람 기분 좋게.'

'나는 또 뭘 이렇게 주변머리가 없나.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 되지 뭘 무르지도 못할 일을 계속 생각하고 말하고 있지? 그럼 친구가 괜찮다고 하지 다시 사 오라고 하겠어?'

내가 꽃다발 고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친구가 알면 정신 나간 애라고 할 것 같아 잠깐 고민한 것처럼 무심하게 말하고 입을 닫았다. 그만하자, 그만해.


내가 좋은 마음으로 고, 친구도 이렇게 좋아하면 됐지 뭐. 그 마음을 의심하며 꽃다발 사이즈를 친구가 비교할까 봐 걱정한 듯 연연한 내가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가끔 누구에게 말하기도 피한 일을 혼자 이럴까 저럴까 오래 고민하는 것이 참 고민이다.

결정을 빨리 못해서 고민하는 것은 그래도 낫다. 이미 결정된 것을 비디오 테잎을 되감듯이 그때 그 장면으로 돌아가 그렇게 안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TV 인생극장을 찍듯이 못 가본 길을 하염없이 가다 보면, 이런 시간낭비, 에너지 낭비가 없다.


후회는 물론이고, 이러면 어땠을까 상상하는 것도 그만하자.

인생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은 대부분 내가 어찌했어도 대세의 흐름을 바꾸지 못했을 것이다.


나이 마흔이 넘게 유리멘탈로 살았는데 한 번에 강철멘탈이 될 수야 없겠지만 이제 그 많은 시행착오도 겪었으니 어느 정도는 될 대로 되도록 놔두는 것이 좋다. 물론 왜 나는 될 대로 되게 놔두지 못하는 걸까를 이렇게 오랜 시간 고민하고 있는 걸 보면 아직 멀긴 했다.


그래도 요즘은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놓아버리는 일이 예전보다는 아져서 다행이고, 이렇게 글이라도 써서 실타래처럼 엉킨 묵직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놓을 수 있으니 그것도 다행이다.


김연아 선수가 인터뷰에서 실수에 대한 마인드 컨트롤을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까

"제가 후회한다고 해서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다시 트리플 악셀을 잘하고 올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빨리 잊어버리려고 해요. 그래야 남은 경기를 실수 없이 잘할 수 있어요."

이 말을 듣고 정말 두 손을 들어 소리 나게 박수를 쳤던 기억이 난다.


김연아 선수의 명언처럼, 다시 돌아가서 제대로 해놓고 올 수 없는 일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자. 또 내가 생각한 '제대로'가 정말 정답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 후회도 하지 말자.



하지만, 꼭 고치지 않아도 괜찮다.

누가 봐도 피곤한 내 스타일이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걸 그런대로 조심스러운 성격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것조차 고민할 대로 하도록 놔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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