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을 읽지 않았어도 김영하 작가의 팬이다.
작가를 만난 시점은 독자마다 다르니까.
이공계 학생이지만 교양과목은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것이 대학이었다.
90년대 말, 대학에 들어가 매 학기 문예창작과에서 개설한 교양수업을 들었다. 교양과목을 고를 때, 예술대학교 카테고리에 개설된 ‘현대소설의 이해’ ‘명작 감상의 이해’ ‘인간과 문학’ 같은 과목을 보면 가슴이 서늘하게 쿵 내려앉았다.
‘나는 원래 문과 체질이야, 작가가 꿈이었잖아.’ 입밖에도 꺼내지 못할 부끄러운 말이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미련이 남아있었고, 그 욕망을 충족하고 싶어 한 학기 한두 개의 숙제 많은 강의를 기쁘게 들었다.
강의가 있는 날은 설렜다. 식품공학과의 그 어떤 전공과목도 나를 설레게 하지 않았다. 문창과 교양수업은 지각 한번 없이 거의 매번 앞자리에 앉아 교수님의 영혼과 교감하듯 눈을 마주치며 들었기 때문에 백여 명이 같이 듣는 대 강의실에서 내 이름을 기억하는 교수님들도 있었다.
단 한번 친한 선배와 ‘문학의 이해’를 같이 들었다. 선배는 어차피 교양수업 학점도 채워야 하고, 친한 나와 설렁설렁 수업을 들으며 잡담이나 할 생각으로 들어왔다가 매시간 A4용지 한 장씩 독후감을 써야 하는 숙제를 받아 들고 학기 내내 나를 원망하기도 했다. 사실, 나도 친한 선배라 무심코 같이 듣자고 한 것이었는데 수업시간에 자꾸 말을 시키는 바람에 같이 들은 것을 후회했다. 난 수업에 집중하고 싶으니 말을 시키지 말라고 할 수도 있었으나, 그런 수업을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듣는 것이 어쩐지 좀 따분한 캐릭터로 비칠 것 같아 같이 지겨운 척하느라 그게 더 힘들었다.
당시 숙제로 김영하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현실인지 망상인지 경계가 모호한 대역배우 여성에 대한 이야기 ‘호출’이 실린 소설집의 소설들은 신선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읽어왔던 기구하거나 참담한 사연들이 주를 이루던 질퍽한 한국소설들과 달랐다. 깔끔하고 담백했다. 성적인 묘사가 담긴 것들도 있었지만 특별히 선정적인 내용이 아닌 작품들, 전혀 성적인 것과 무관한 작품을 읽는데도 세련된 문구와 기발한 아이디어 때문인지 뭔가 전반적으로 섹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그게 뭔지 잘 몰랐는데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뇌섹남’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후에 다양한 사진을 봤을 때 조금 더 잘 생겼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음을 인정한다.
특히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베스트 극장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져, TV로 보면서 내가 아는 그 소설이 드라마가 되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마치 나만 아는 작가의 작품인 것 처럼 뿌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로 김영하 작가의 소설은 거의 읽지 않았다. 어둡고 우울한 소설들을 의도적으로 피하던 시절이 찾아오면서 김영하 작가의 소설에 자연스럽게 손이 가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김영하 작가의 소설에 대해 논하는 자리에서 나는 할 말이 없다. 유명한 ‘살인자의 기억법’조차 읽지 않아서 팬이라고 자처하기에 자격미달이다. (왠지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지 않은 것은 조금 미안하다)하지만 내 마음속으로 나는 엄연한 김영하 작가의 초기 팬이다. 말하자면 ‘설립 멤버’ 같은 거라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자부하고 있다.
역시나 더욱 유명해져서 방송에도 많이 나오고, 교수님도 되고, 알쓸신잡에까지 나오는 모습을 보며 아, 내가 진짜 초기 팬인데라며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이건 연기의 신이라 불리는 배우 이병헌의 발전한 모습을 보면서, 나 '해뜰날' 때부터 팬이었는데,라고 아무리 말해도 주변에서 들은 척도 안 해주던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서점에서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구입했다. 한번 읽어봐야지 생각만 했다가 우연히 눈에 띄어서 얼른 집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오랜만에 신선한 충족감에 젖었다.
에세이의 시대라고 할 만큼 에세이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작가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에세이를 쓰고, 나도 그 글들을 소비하고 있고, 나조차 에세이를 쓰고 싶어서 열심히 시도 중이다.
전문 작가가 아닌 사람들의 에세이에 담긴 진솔함에서도 울림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읽으면서 작가의 에세이란 이런 거구나, 너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의 경험을 글로 적은 산문, 일련의 사건 속에 자신을 이루고 있는 지식과 지혜, 철학을 녹여 사유한다는 것이 이런 걸까.
아직 ‘검은 꽃’ 같은 것은 편히 읽을 만큼 멘탈이 양호하지 못하지만 ‘살인자의 기억법’ 정도는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여름에 한번 시도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