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Dear 워킹맘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아기에게 책 읽어주세요

[Dear 워킹맘] 짧은 시간, 농축된 교감

by 춘춘
“이미 읽었던 책들을 매일 동일한 시간에 반복해서 읽어주었어요.
아기가 돌아다녀도 저만치 떨어져서 마치 배경 음악처럼 읽었어요. 듣든지 말든지.”



뉴스앱 <헤드라잇>에 동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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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커다란 그림 동화책이 있었습니다. 펼치면 신문 사이즈만큼 큰 책이었어요. 한국 전래동화와 이솝우화들로 다 합하면 한 열 권 정도 됐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책은 제가 구입한 것이 아니라 시누이들과 외숙모에게서 물려받은 책이었어요. 제가 아기를 낳던 해에 사촌 동생은 스무 살, 조카들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나이였으니, 형님들과 외숙모는 이 책들을 최소 15년 이상 보관하고 있다가 저에게 물려주신 거죠. (이사도 몇 번이나 하셨을 텐데 어디에 그걸 다 모아두셨었는지 대단하시지 않습니까?)

책은 낡았지만 어차피 호랑이와 곶감, 토끼와 거북 이야기는 바뀌지 않았고, 책의 사이즈도 아기를 앞에 앉히고 읽기 너무 좋아서 다른 책을 살 필요가 없었지요.


책이 크니까 글씨도 크고 그림도 커서 아기를 무릎에 앉혀 놓고 읽어주기 딱 좋았습니다. 기어 다니는 아기를 무릎에 앉히고 아기 앞으로 큰 동화책을 펼치면 앉아있는 아기의 시야 전체가 책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니 아기는 다른 곳을 볼 수 없어 자기 앞에 펼쳐진 책만 바라보게 되죠.


처음 이 책을 아기에게 읽어준 것은 아기가 기어 다닐 때였습니다.

당연히 책 한 권을 다 읽을 동안 제 무릎에 앉아있지 않았죠. 서너 장 읽다 보면 그 짧은 얘기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른 곳으로 기어가 버렸습니다. 쏜살같은 속도로요. 그맘때는 어쩜 그렇게 빨리 길 수가 있을까요?


다른 것은 열심히 뒷받침해 줄 열정도 체력도 시간도 부족했지만 매일 책만은 읽어주리라 다짐했는데 아기가 저렇게 협조해 주지 않으니 좌절감이 들고, 읽어주기 싫어지더라고요.

분명히 아기 때부터 책을 읽어주면 애들이 책 읽어 달라고 졸졸 따라온다던데 우리 애는 벌써부터 공부는 글러먹은 것인가, 선행 학습을 하기 전에 선행 걱정부터 들었습니다.


그래도 딱히 다른 아이디어가 없어서 그냥 지속했습니다.

놀고 있을 때 억지로 데려다 앉히면 징징거리기만 할 뿐 책을 싫어하게 되는 부작용만 생길 것 같아서, 놀고 있는 아기 옆에서 그냥 책을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사실 아기를 안아다가 무릎에 앉힐 기운도 없었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일 거예요. 퇴근하고 들어와 씻고, 옷 갈아입고, 최소한의 집안일을 하고 나면 아기와 놀 에너지가 거의 없죠.

이미 읽었던 책들을 매일 동일한 시간에 반복해서 읽어주었어요. 아기가 돌아다녀도 저만치 떨어져서 마치 배경 음악처럼 읽었어요. 듣든지 말든지.


그렇게 아무 기대 없이 아기 옆에 앉아서 동화책을 읽던 어느 날,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아기가 내 쪽으로 기어 왔습니다. 제 앞까지 도착해서는 뒤로 돌더니 뭉그적대며 엉덩이를 들이밀어 내 무릎과 책 사이로 끼어들어오는 거예요.

기저귀를 차서 한껏 부푼 엉덩이가, 제 양반다리 위로 올라앉는 순간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다음부터 큰 동화책 읽어주는 시간은 우리 둘에게 가장 재밌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책 읽자고 하지 않아도 그냥 제가 큰 동화책을 들고 읽기 시작하면 어디서 놀다 가도 다다다닥 기어 와서 책과 제 사이에 머리를 들이밀었습니다.

점차 한 번에 읽는 책의 분량도 늘어나고, 나중에는 앉은 자리에서 대 여섯 권을 읽어도 더 읽으라고 잉잉 거리는 통에 귀찮아서 중간에 자르는 일들도 종종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던 호랑이와 곶감은 나중에 아기가 말문이 트고 나서는 끝까지 외울 정도였습니다.

그 후로도 책 읽어주기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가 책을 많이 읽는 아이가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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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제가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물어봅니다.


"그래서 애가 지금 책 많이 읽어요?"


안타깝지만 현재 열세 살인 저희 애는 책 읽기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 만화책은 주야장천 봅니다. 그런데 글씨 많은 책은 도통 재미를 붙이지 못합니다. 본인이 읽기 싫으니 남들은 다 혼자 열심히 동화책을 읽는 열 살까지도 저는 매일 밤 책을 읽어주었습니다.


"아니, 책은 별로 안 읽어요."

이렇게 답하면, 안쓰러워하거나 황당해하는 반응을 보이죠.

"아~ 어떡해요. 노력하셨는데."

이런 얘기를 들으면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아이가 책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내가 책 읽어준 그날들은 다 의미 없는 걸까요?


책 읽어주기의 목적이 '독서 좋아하는 아이 만들기’라면 의미 없는 시간이었겠죠. 저도 솔직히 아기에게 책을 읽어 준 초기 목적은 '독서 잘하는 아이'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아이가 자라면서 책벌레가 되지 않아 조바심을 낸 적도 있었고요.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라기까지 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죠. 저도 안타깝긴 합니다.


그런데 십여 년을 꾸준히 아이와 같은 책을 읽으면서 기대 이상의 훨씬 깊이 있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대화거리가 풍부해지는 거예요. 책은 얘깃거리를 만들어줍니다.

워킹맘들은 집에 와서 아이와 놀 여력이 없어요. 대화를 나눌 여유도 없죠. 빨리 눕고 싶고, 자고 싶어요. 몸으로 좀 놀아줘야 하는 건 알겠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걸요.


그래도 아이와 대화를 좀 나누려고 하면 '오늘 어린이집에서 뭐 했어? 누구랑 놀았어? 뭐 먹었어?' 이런 질문 공세를 펼치는 것 말고는 할말이 없습니다. 물어본다고 답을 잘해주지도 않고요.

그럴 때 책을 읽어주면 자연스러운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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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서 지식을 쌓게 하고, 글씨를 빨리 익히게 하려고 하면 속이 탑니다. 저희 아이는 책을 통해 뭘 배우는 것 같지도 않고, 글씨도 빨리 익히지 못하고, 그저 엄마랑 수다만 떨려고 안달이었습니다.

책을 읽는 중에 하도 말을 걸어서 짜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빨리 다 읽어주고 자고 싶은데 한 문장 읽으면 조잘거리고, 또 한 문장 읽으면 딴 소리하고. 정말 속 터졌죠.


그래도 그런 시간들을 겪고 나면 아이와 '척하면 척' 통할 때가 잦아집니다.

어릴 때부터 읽어준 그림책들은 엄마와 아이의 기억 속에 군데군데 함께 남아 일상생활에서 연상되는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떠오릅니다.

"야, 이거 커다란 무에 나오는 그 무처럼 생기지 않았어?"

"어! 나도 나도 그 생각 했어."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더 얘기를 들어주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실없는 소리들을 더 오래 나눌 걸 그랬습니다. 그런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아쉬움이 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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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이면 중학생이 되는 제 아들은 지금 열세 살입니다.

아직까지도 잠들기 전에 책을 읽어주면 좋아합니다. 그래서 혼자서 좀 읽었으면 하는 역사책을 읽어줍니다. 당연히 집중해서 듣지 않습니다. 책의 내용보다 그냥 엄마가 옆에서 뭘 읽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들이 좀 무뚝뚝한 편인데요. 학교에서 뭘 했는지, 누구랑 친한지 좀 물어보려고 하면 "캐묻지 마." 하며 철벽을 칩니다. 캐묻는 데까지 가지도 못하고 질문 딱 두 개 했는데 저런 소리를 들으면 기분 상해요.

그런데 누워서 책을 읽어주면 갑자기 수다쟁이가 됩니다. 역시나 책 얘기는 하지 않고, 책을 읽다가 연상되는 뜬금없는 주제들을 말하기 시작해요. 아니면 딴생각을 하고 있다가 제가 책 읽는 중에 갑자기 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끝도 없이 주절거리기도 하고요. 친구 얘기, 게임 얘기, 학원에서 있었던 일 같은 것들을 말이죠.

이야기가 끝이 없어지면 피곤하지만 어찌 생각해 보면 사춘기에 들어서는 아들에게 그만 말하라고 할 만큼 얘기를 나누는 것이 행복하기도 합니다. 이 시간도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만 그때 우리에게는 같은 기억이 남아있겠죠.


아이가 자라면서 같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없어지죠. 책에는 무궁무진한 주제들이 펼쳐져 있고, 희로애락이 다 들어있습니다. 아이와 함께 그 세계를 같이 느끼는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건 없이 책 읽어주기를 추천하는 저도 가끔은 애가 좀 스스로 책을 많이 읽었으면, 나랑 읽듯이 혼자서도 책을 즐겼으면, 내가 읽으라고 안 해도 책을 찾아 읽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사실은 아직도 그 바람을 놓지 못하고 청소년에게 인기 있는 책, 독서 선생님들이 추천하는 책 같은 것들을 잔뜩 구입합니다. 안 읽고 쌓아만 둔 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책값이 생각나서 속이 아려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책을 좋아하는 것도 취향일 것이고, 언젠가는 봐주길 바라는 수밖에요. 안 보더라도 할 수 없습니다.


나와의 책 읽던 추억들, 우리가 같이 빠져들었던 이야기들이 아이의 삶에 즐거운 기억으로 남기를 바랄 뿐입니다. 기억나지 않더라도 그 느낌, 그날들의 분위기가 차곡차곡 쌓여서 아이의 어딘가에 자양분이 되어있을 거라고 믿으면서요.

짧은 시간에 농축된 교감을 할 수 있는 책 읽어주기.

아이가 한글을 익히고 나면 엄마가 책 읽어주기를 이어가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요. 독서교육과는 별개로 아이에게 책 읽어주기를 한번 해보세요.

저는 참, 좋았습니다.



얇고 흐느적거리는 큰 동화책은 정리가 되지 않아 집안 곳곳에 굴러다녔습니다. 그래서 이런 카다로그를 꽂는것 처럼 생긴 책꽂이도 사서 한참 사용했어요.




뉴스앱 <헤드라잇>에 동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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