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일본인도 유고인도 도망간 땅에서 한국인이 해낸 일

힘들었던 그들에게 박수를, 과거로부터는 해방을

by 춘춘

"그때 집을 사려고 보니까 목동, 안양, 신림동, 여기, 이 정도 갈 수 있겠더라고. 근데 목동은 번잡하고 살기 안 좋아 보였어. 신림동은 니 아빠가 싫어했고. 안양에 가려니 전화번호를 바꿔야 되는데, 경기도 전화번호 받는데 몇 개월 걸린다는 거야. 니 아빠가 출장 가면 며칠씩 걸리는데 전화번호 없이 살 수가 없었어. 그래서 안양은 못 갔지. 여기 와보니까 앞에 놀이터가 널찍하니 있어서 니 아빠가 애들 놀기 딱 좋다고 마음에 들어 하는 거야. 그래서 여기로 온 거지."


"와, 목동, 안양, 신림동 아무 데나 갔어도 여기보다 집값이 몇 배는 됐을 텐데, 몇 배가 뭐야 열 배 차이나는 데도 있어. 참 팔자네 팔자."


"그렇지 뭐. 하나마나 한 소리지."


"그래도 뭐, 우리 여기서 행복하게 살았어. 지금도 한적하니 좋아."



아빠가 마음에 딱 들어서 선택한 여기, 금천구는 당시에 구로구에 속해있었습니다. 그 후, 40년이 지난 지금 서울시에서 집값이 가장 오르지 않은 지역 중 하나지요.


뉴타운 발표로 서울이 들썩거리던 시기에도 이 동네는 고요했습니다. 주민들이 다 같이 합심해서 뉴타운에 속해보자는 활동을 안 해본 것도 아니었지만 성과는 별 볼일 없었어요.

이후에도 재테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몇 차례 있었으나 아빠는 리스크를 감수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엄마가 말씀하시기를

"통장이 두 개만 돼도 한 개를 없애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이 니 아빠다"

저는 우리 아버지를 참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냉철히 판단해서 재테크에는 영 소질이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아빠가 확신도 없이 그 멀고 먼 곳으로 돈을 벌러 갔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어쩌면 그런 위험들을 감수하며 살았던 탓에 그 이후의 삶은 더 안정을 추구하는 편에 섰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박기사님 이야기 2편

1979년, 이라크 움카슬


한국 근로자들을 실은 비행기는 쿠웨이트 공항에 착륙했다. 열시간 이상 앉았던 비행기 의자에서 벗어나 인부들은 줄을 선 순서대로 이국 땅의 비행기 트랙을 밟았다. 눈부신 햇살과 함께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연기가 훅 끼쳐와 숨이 막혔다. 땅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사이로 보이는 풍경이 낯설었다.


목적지인 이라크 움카스르까지는 육로로 이동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박기사는 일행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박기사의 버스 옆좌석에는 영등포에서 만났던 윤씨가 나란히 앉았다. 출국할 사람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다시 만난 윤씨는 여전히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먼저 아는 척을 했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그래도 일면식이 있었던 윤씨를 보자 박기사는 반가워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바로 이라크로 들어가지 않고 쿠웨이트에서 집을 풀었다. 며칠을 묵은 후 사판 국경을 넘어 이라크로 들어갔다.


바레인을 경유한 버스는 몇시간을 달리고도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는지 가는 도중 식당 앞에서 멈추었다. 현지 식당에서는 메뉴를 고를 것도 없이 근로자들에게 다 같은 양고기 수프와 주스를 내어 주었다. 양고기는 매캐한 냄새가 익숙하지 않았고 미지근한 주스의 맛도 들큰했다.

입에 맛지 않는 음식을 몇 숟가락 뜨지 못하고 두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박기사는 기내식 이후에 아무것도 먹지 못한 배를 채우느라 묵묵히 수프 속 건더기를 삼켰다.


버스는 한참을 더 달려 페르시아만 끝자락 바닷가에 도달했다. 작업 현장은 숙소에서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다. 잠시 여독을 풀고 일행은 현장으로 이동했다.


바다와 육지가 교차하는 곳에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크레인 기둥이 장엄한 기운을 내뿜었다. 드넓은 해안선을 따라 바삐 움직이는 중장비들은 수평선 너머 떨어지기 시작하는 태양빛을 받아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뜨겁고 마른 공기 때문일까, 박기사는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황량하다는 생각을 했다.

현장 안내 겸 신입 교육이 시작되었다.


이 과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은 현장 총괄 과장이었다.

“여기는 부두공사 현장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기 초입에 방치된 콘크리트 더미 보이시죠? 저게 굳기 불량으로 해체하다가 중단한 겁니다. 전에 다른 나라가 와서 하던 건데요. 그 쪽에서 공사를 못 마쳐서 우리가 들어온겁니다.”

일본과 유고에서 온 사람들이 공사를 벌려놓긴 했지만 열악한 현장 상황을 배겨내지 못하고 도망가다시피 철수해서 이모양이라는 것이 이 과장의 비 공식적인 설명이었다.


“부두 공사는 세단계 작업으로 나뉩니다.

먼저, 부두가 들어설 자리의 바닷속에 10미터가 넘는 긴 파일을 수십개 박아넣습니다. 그게 바다 밑바닥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기둥 같은 거지요. 파일이라는게 뭐냐면, 속이 비어있는 한 아름 되는 굵고 긴 쇠 파이프입니다. 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놓은건데요. 그걸 크레인으로 뻘 속에 박아 넣습니다. 이 작업을 ‘항타’라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파일에 금이 가면 바닷물이 파일 속으로 스며들 수 있기 때문에 잠수부들이 바닷속으로 들어가서 구멍난 곳에 땜질을 합니다.”


“그 다음 단계는, 뻘에 단단히 박은 파이프 속을 채우는 겁니다.

우선 특수 철근을 최대한 많이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나서 레미콘으로 특수 시멘트를 싣고가서 철근 사이사이에 채워 넣는 겁니다. 그럼 파일속이 철근과 시멘트로 메꿔져서 단단한 기둥이 됩니다. 그걸 저렇게 수십개 만듭니다. 바닷속에 쇠 기둥을 세우는거죠.”


“저기 과장님, 바닷속에 세운 파이프에 어떻게 레미콘이 가서 쎄멘을 넣습니까?”


“아, 그건요. 빠지선을 써야됩니다. 차가 물을 가로지를 수 없으니까 빠지선을 타고 들어가서 해야합니다. 항타하고 나면 빠지선이 들어가서 작업하는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파일 위로 바닥 공구리를 치는겁니다.

그러니까, 철근과 콘크리트로 내부를 채운 수십개의 파일을 두꺼운 철근으로 모두 엮어요. 철근 그물망이 바다위에 판판한 바닥을 이루는 모양새가 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엮어놓은 철근들을 다 메꿔야겠죠. 광장같이 넓은 부두바닥이 형성될 수 있도록 콘크리트를 부어서 양생하면 그게 부두가 되는 겁니다.”


어마어마한 공사규모과 처음 보는 공법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박기사들은 입이 떡 벌어졌다.

부두공사를 경험해 본 사람은 당연히 없을 것이고, 국내에서 이정도 규모의 공사현장에서 일을 해본 사람도 드물 것이다. 보기만 했던 일을 했다고 적었던 이력서가 생각나 박기사는 앉은 자리가 불편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불편한 사람은 박기사뿐이 아닌 것 같았다. 영등포에서 이력서를 낼 때야 일단 가고 보자는 심산으로 살을 붙여 적어 넣었지만 이제 눈 앞에 닥친 공사장에 바로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이라 모두들 솔직해지기 시작했다.


총괄 과장도 어느 정도 각오는 되어있는 듯 인부들에게 한국에서 했던 일들을 물었다.

일부 특수공들을 제외 하고는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공사와 관련된 일을 해 보기라도 했다면 다행이다. 학원 강사 하던 사람, 장사하던 사람 등 알음알음으로 돈벌이가 된다는 소문만 듣고 온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같이 온 사람들의 경력을 듣다보니 박기사의 불안이 삽시간에 달아나 버렸다. 덤프트럭 운전기사에, 고속도로 공사에도 참여 했던 박기사의 이력은 그 중에서도 상급이었다.

오합지졸의 인부들을 둘러보던 총괄 과장은 한숨을 내 쉬었다. 일손이 딸리는데 처음부터 다 가르쳐서 현장에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 고민스러운 표정이다.

공사일정은 빠듯하고 다른 선택은 없었다. 곧바로 교육이 시작됐다. 실전에 투입시키기 위해 선배들이 신입을 한두명씩 붙잡고 개인 교습에 들어갔다.

박기사는 트럭운전을 오래 한 덕에 대형 차량 운전을 약간 배운 후 바로 현장에 투입되었다.


한쪽에서는 기능공들이 크레인으로 모래와 자갈싣는 작업을 배우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호퍼라고 하는 커다란 사각집게로 자갈을 집어 덤프트럭에 올리는 작업이다. 집게를 끌어올리는 것은 대략 7미터쯤 되는 크레인이다. 크레인 위에서는 바닥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순전히 기능공이 감으로 들어올려야 한다. 전문가는 한번에 1루베씩 잡아 올리는데 신참들은 0.1 루베도 채 잡지 못했다. 한번에 퍼 담을 양을 열번으로 나눠서 담는 겪이니 시간이 열배는 걸렸다. 15톤 덤프차 한대에 자갈을 싣는데 숙련공은 10분이면 할 일을 갓 도착한 기능공들은 1시간씩 걸려야 겨우 마치는 것이다.


그나마도 트럭조차 몰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물차 운전을 했다. 탱크로리에 물을 가득 담고 공사 현장 바닥에 물을 뿌리는 작업이다. 워낙 큰 공사현장에 흩날리는 흙판이다보니 비산먼지 방지작업이 필수였다.

윤씨는 서울에서 소형 트럭 운전을 하던 사람이라고 했다. 발빠르게 움직이는 성격이라 처음에는 물차 운전을 하더니 금새 덤프차 운전 업무를 맡게 되었다.


뜨거운 날씨, 열악한 근무환경, 익숙하지 않은 일들에 힘들었지만 이탈할 수도 없었다.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비행기 값을 물어야 하니 도망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다. 어쩌면 도망갈 길을 열어줘도 아무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가진 기술하나 없이, 아무 정보도 없이 무작정 먼 나라까지 온 사람들의 각오는 대단했다. 중동 특수 오일달러를 벌어보겠다는 집념 하나로 모여든 사람들이니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밀어 부쳐도 이를 악물고 배워냈다. 시간이 흘러 다들 자기 자리를 찾아갔고, 공사는 그런대로 진척되었다.


[출처] 해외건설협회 ICAK 홈페이지 _ 이라크 움카슬 부두공사 (삼성물산, 1977~1980)



박기사님 인터뷰

2022년 박기사님 자택


박차장 : 한국인들이 어딜 가도 일 잘하긴 하지, 성실하고, 그래도 그렇게 일이 진척된 게 신기하네.

박기사 : 기술은 없고, 기술자도 부족하고 그러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게 틀어지면 국가부도였거든. 신원 개발로 들어가서 이라크에 갔는데 가서 좀 있다 보니 삼성으로 바뀌었더라고. 신원 개발이 부도 처리되고 삼성에서도 손해를 감수하고 공사를 맡은 거야.

박차장: 아, 그렇구나.

박기사: 그때 한국 건설이 얼마 안 됐잖아.

70년대 우리 기술이야 뭐 경부고속도로 정도였지. 인건비도 싸고, 애로사항 많았지.

그때는 한국 중장비가 어딨냐, 중동에서 쓰던 거 가지고 와서 하고 그랬어. 그런 과정을 거쳤지.

건설회사가 빨리빨리 하고, 밀어붙이고, 그런 공정 속에서 와우아파트도 무너지고, 성수대교도 무너지고 그런 가슴 아픈 사건들도 생기고......

시간이 지나면서 기술을 익히고 나중에는 영양가 있는 것도 우리 한국 건설업체들이 다 나가서 하게 됐잖아. 고부가가치 기술 확보하면서 플랜트 건설이라던가, 담수화 건설이라던가 그런 것들 할 수 있게 되고......

지금은 세계 경기가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그래도 한국이 치고 올라갈 수 있는 게 많다잖아. 정치 잘하고 통일도 되고 하면 니들이나 니들 애들 세대는 제일 잘 사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

박차장 : 어, 비리만 없으면. 그런데 지금도 빨리빨리는 여전해. 건설뿐 아니라 다른 곳에도 밀어붙이는 거 좋아하고. 안전불감증도 당연히 있고.

박기사 : 그렇지, 많이 좋아지긴 했어도 남아있지.


2022년을 살고 있는 박차장의 생각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로부터 자요로워지기 위해서다 _ 유발 하라리]



제품을 개발하는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은 일정과 원가입니다. 늦어지는 날짜대로 비용이 늘어나고, 원가는 이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일정과 원가는 프로젝트의 제1 목표가 되죠.

일정 단축과 예산 절감은 높은 프로젝트 평가의 기준이 되며,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해 낸 실무자는 전설로 남습니다.

7,80년대 중동 건설 현장에서 한국인은 성실과 집념으로 사막의 기적을 일궜다는 타이틀을 얻었죠. 찜통더위와 열악한 공사환경 속에서 다른 어떤 나라도 해 내지 못한 성과를 이뤘습니다.
국가의 위상이 높아지고, 근간을 다질 수 있었던 당시의 성공에 수많은 현장 근로자의 땀과 눈물이 함께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노동력이 경쟁력이었던 과거와는 다른 나라가 되었습니다. 고도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기술과 공법을 팔 수 있는 기술 선진국이 되었고요.

그러나 제조, 근로, 건축현장에서는 아직도 '안 되는 일은 없다'는 생각이 팽배합니다. 실무자가 합리적인 일정과 예산 계획을 짜면 위에서 반토막 내기 일쑤고요. 어떤 프로젝트도 여유 있게 돌다리 두드려가며 진행할 수 없습니다.

일정과 원가는 제품의 품질과도 직결됩니다. 일정에 쫓기거나 무리해서 비용을 절감하다 보면 부실한 제품이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근로자는 근로자대로 날밤을 새워가며 일정을 맞춰야 하고요.

유발 하라리가 말했습니다.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기란 쉽지 않다. 모든 것이 달라진 상황에서 배울 점을 찾는 것은 어렵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이다."

포기하지 않고 길을 찾았던 과거의 집념은 본받을 점입니다. 힘겨웠던 그들에게 박수와 위로를 보냅니다.

지금 우리는 달라진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열악한 상황에서 일을 추진하기 위해 필요했던 '까라면 까라'문화로부터 이제는 해방되어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 모집요강 일 순위: 신체 건강한 젊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