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공정하지 않은 싸움터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할때

프로세스만 착실히 지키면 되는 날을 바라며

by 춘춘

에인션트 원은 절대악의 힘을 빌려 악을 막아내려고 했습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에인션트 원의 편에 섰고 모르도는 에인션트 원의 방법에 동의하지 않았죠.


정의는 어떤 방법으로든 지켜야 하는 것인가. 방법이 불순하면 정의도 퇴색되는 것인가.

늘 결론에 도달하기 힘든 난제입니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정의까지 고민하는 것은 너무 벅찹니다. 어벤저스 시리즈를 볼 때 잠시 '정의가 필요하군'하고 생각할 뿐이죠.


그러나 가끔 일상에서도 그와 비슷한 판단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정해진 규칙을 지키는 것이 옳은 것임을 알지만, 그렇게 해서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을 때, 활용 가능한 편법을 이용해도 되는 걸까요?


과거에도, 현재에도, 이런 상황은 종종 벌어지지만 정답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사십 년 전에도 그랬습니다.



박기사님 이야기 4편

1979년, 이라크 팔루자


1. 어디에나 로비는 있다.

팔루자에는 이라크 곳곳의 공사 현장에서 시멘트를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이 모여든다.

박기사 일행이 이틀간 차를 달려 도착한 시멘트 공장 주변은 모래 바람이 부는 황무지였다. 공장뒤로 펼쳐진 높은 지대는 황토색 언덕이 굽이치는 모양으로, 사막의 모래로 빚어진 산이 끝도 없이 펼쳐진 듯한 모습이었다.


방대한 공장부지를 크게 돌아 벌크 원료가 저장된 사일로 무리를 지나자 경비실 처럼 생긴 접수창구가 나왔다. 조그만 창문 안쪽에서 현지인이 한명 앉아 시멘트를 받을 수 있는 티켓을 끊어주고 있었다.

오는길에 타이어 펑크로 한참 시간을 잡아먹은 박기사 일행은 오후가 되어서야 공장에 도착했다.

건물 옆 벌판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벌크 트레일러들이 수십대 세워져 있었고 접수창구 앞은 줄서 있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다양한 언어로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트럭 소음 사이로 끊임없이 들려왔다. 바스라에서 공사중인 현대건설 인부들도 간간이 보였다.

처음보는 광경에 윤기사는 입이 떡 벌어졌다.


“시멘트 타가는 데가 이렇게 많아요?”

“오늘은 좀 적은 편이야. 많을 때는 이 앞에 꽉차서 바깥까지 나가서 기다려야 돼.”


줄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운전사들은 건물을 둘러 싼 낮은 담장 위에 걸터 앉아 지친 얼굴로 하염없이 창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 여기 대기실이 있어.


박기사 일행은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말이 대기실이지 사방에서 부는 모래바람이라도 막아보려고 베니아판을 붙여 만든 한평 반쯤 되는 공간이었다. 선풍기도 없는 대기실에 앉아 있다가 답답하면 담을 타고 앉아 창문 바라보기를 반복하는 동안 서너시간이 흘렀다.

지평선 뒤로 넘어가는 태양 빛이 하늘을 붉게 물들여 갈 무렵이었다. 안에서 티켓을 끊어주던 담당자가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주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창구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인샬라!”

항의하는 사람들을 보며 뚝뚝하게 한마디 던진 창구 직원이 창문을 탁, 하고 닫아버렸다.


“아이고, 저거 저거 또 저러네.”

“뭐예요? 벌써 끝난거예요? 아직 시간 안됐는데.”

“물건이 바닥난거야. 오늘은 끝이야. 숙소로 가자고.”

“그럼 내일와서 받는거예요?”

“그것도 아니야. 이렇게 줄 서있으면 내일 기다렸던 순번대로 줘야되는데 내일또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야.”

“먼저 와서 줄을 서면 되는거 아니예요?”

“그게 아니고, 시멘트 타는데도 순서가 있어. 내무성, 외무성, 주택공사, 국방성, 항만청……그 뒤로도 타가려는 공사가 많다고. 우리는 항만청공사라 국방성까지 다 가져가야 오더를 받을수가 있어. 근데 내일 아침에는 또 내무성부터 시작이라니까. 그래서 이렇게 한번 오면 며칠씩 걸려도 못타는거야.”

“그럼 어떡해요? 기다려도 안된다면서요?”

“기다려봐. 내일은 정채환이가 손을 쓸꺼야.”

박기사가 배시시 웃으며 바라보자 정씨도 싱긋 웃으며 얼굴을 문지른다.


박기사 팀에게는 정씨가 있었다.

정씨는 관리직도, 운전기사도 아닌 보일러공으로 한국에서는 영어 강사를 하던 사람이었다. 영어를 할 줄 알았고, 아랍어도 대충 눈치로 몇 마디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변죽이 좋아 아무하고나 금새 친해지곤 했다. 내세울 만한 기술이 없는 정씨가 핵심 인물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던 이유는 이 기민함과 친화력 덕분이었다.


다음날, 일찌감치 아침밥을 먹고 숙소를 나선 일행은 접수창구가 열리기도 전에 그 앞에서 대기를 탔다. 박기사들 말고도 어제 시멘트를 타 가지 못한 사람들이 삽시간에 몰려들어 창구 앞은 어제처럼 북적대기 시작했다. 곧 이어 창문이 열리고 담당자가 자리에 앉아 공사 기관 순서대로 티켓을 끊어주기 시작했다. 몇 팀이 티켓을 받아가고 잠깐 자리를 정비하는 사이 담당자는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정씨의 얼굴을 알아보고 빙긋 웃었다.

“헤이 ~ 미스타!” 담당자가 손짓하자 정씨 역시 활짝 웃으며 다가가 티켓을 받아왔다.


“아유, 정형만 있으면 오더 타는 거 일도 아니네요.”

”저 봐, 저 사람들 사이로 걸어가서 단번에 티켓을 받아오는거 보면 개선장군이라니까.“

바지에 뭍은 흙먼지를 툭툭 털며 박기사가 기분좋게 말했다.


정씨는 창구 직원들과 한두마디 나누기만 해도 스스럼 없이 인사하고 지내는 사이가 되어 버린다. 미리 안면을 터 놓으면 그 다음은 좀 쉽다. 한가한 틈을 타 접수창구 창문을 슬쩍 열고 ‘미스타!’하고 부른다. 대충 인사를 나누다가 슬며시 라이방, 카메라, 립스틱 등 한국 입국자 편으로 들여온 물건들을 티안나게 찔러준다. 그러면 저쪽에서도 피식 웃으며 못이기는 척 물건을 받아 넣는다.


그렇게 미리 기름을 쳐 놓으면 시멘트 오더 발행 창문이 열렸을 때, 담당자가 대기중인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적절한 시기에 정씨의 얼굴을 알아보고 “헤이~ 미스타!” 하며 불러 티켓을 주는 것이다. 요령만 있는게 아니라 인심도 좋고 사람도 좋은 그는 아예 창구 직원들과 친구가 되어 그 집에 놀러 가기도 할 정도였다. 물론 가족들이 좋아하는 선물들을 틈틈히 주면서 관계를 더 돈독히 다져갈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근데 이 일도 쉬운일은 아니야. 서로 눈치 잘 봐서 적당한 때 해야지 현장에서 걸리면 무조건 영창이야. 현찰거래는 벌이 더 무거워. 작년에 한국인도 불법 거래로 2명이나 형무소에 갔다는 소문이 파다해. 그래서 한번에 안되고 저쪽도 상황봐서 해야되는거라 사나흘은 걸리지. 오늘은 저 친구가 단박에 알아봐서 이틀만에 됐네. 자, 출발하자고.”



2. 사람은 똑똑하고 볼 일이라고.

남들 못하는 일을 훌륭하게 해 내는 정씨였지만 보수를 풍족하게 받지는 못했다. 정씨의 화려한 뒷거래는 공식적인 보직은 아닌지라, 수당으로 쳐 줄수가 없었던 것이다.

박기사를 비롯하여 시멘트를 운송하는 기사들이야 운송거리와 시간등을 오티를 추가로 받을 수 있었지만 원래 보직이 기능공인 정씨는 딱 기능공 월급 이상은 기대할 수가 없었다.


사람 다루는 것도 큰 기술 인데, 자기 덕에 공사 일정이 단축되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손에 잡히는 보상이 없는 날들이 이어지자 정씨도 기운이 빠졌다. 한동안 시무룩 하던 정씨는 결국 귀국 의사를 밝혔다. 현장에서 정씨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았던 본부에서도 직원들이 직접 나와 정씨에게 머물러 달라고 사정을 했다. 말리는 사람들을 뿌리치지 못하고 마지못해 정씨는 한달만 휴가를 다녀오겠다며 한국으로 떠났다.


“이거 큰일났네. 시멘트를 받을 수가 없어.”

“저 오대리가 와서 창구 직원하고 얘기한다고 하는데 영 말빨이 안서네요.”

“그러니까 정채환이가 명물은 명물이네. 선물 갖다 안긴다고 아무나 하는게 아니야.”

막상 정씨가 떠나고 나자 시멘트팀에 비상이 걸렸다. 정씨가 있을때는 이삼일 걸리던 배급이 이제 일주일, 열흘씩 걸리게 된것이었다. 한달만 다녀오겠다던 정씨는 두달이 넘어서도 돌아온다는 소식이 없었다.

운송기사들은 밤에는 호텔에 묵고, 낮에는 대기실에서 죽치는 날들만 반복했다. 보다못한 본부에서는 아랍어가 통하는 관리직원 한명을 파견해서 접수창구 직원을 상대하도록 했지만 일은 진행되지 못했다.


“얘기 들었어요? 정형 온대요.”

“그래? 언제? 어디서 들었어?”

“조금 전에 오대리가 그러더라고요. 도대체 일이 진행이 안되서 한국에 있는 정형이랑 합의 봤다고. 정직원으로 온대요.”

“캬…. 그래 그렇게라도 데리고 와야지. 이건 공사 진척이 안되니까. 사람 똑똑하고 볼 일이라고.”


정씨의 복귀는 화려했다. 정직원이 되었을 뿐 아니라 대리 직급을 달고 왔다.

이제 기사들 옆자리에 앉아 천 킬로미터를 따라오던 기능공 정씨가 아니라 본사에 정식으로 적을 둔 정대리가 된 것이다. 정씨의 금의환양은 파격적이었으나 현장 직원들의 질투나 눈총은 없었다. 정씨가 비운 자리가 얼마나 컸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고, 영어에 아랍어까지 능통한 관리직원도 시멘트 공장의 접수시스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으니 다른 기능공들도 정씨의 직급전환을 인정하며 환영해 주었다.



박기사님 인터뷰

2022년 서울, 박기사님 자택


박차장 : 그 정 씨라는 사람은 삼성맨이 된 거네.

박기사 : 그렇지. 이 사람 없으면 일이 진척이 안되니까 다들 인정해 줬지.

박차장 : 그게 언어만 통한다고 되는 것도 아닐 거야.

박기사 : 그렇지. 아랍어 잘하는 관리직 정직원들이 왔는데도 그게 힘들더라고.

박차장 : 근데 뇌물 받은 창구 직원들이 바뀌면 어떡해?

박기사 : 그 사람들도 알음알음 알지. 인수인계하면서 뭐 얘기하지 않겠어? 우리 말고도 그렇게들 했으니까.

박차장 : 그 시절에는 그렇게 안 하면 일을 할 수 없기도 했겠지. 근데 어딜 가나 뒷거래는 있는 거 같아. 어느 시대나 절차대로 잘 지켜서 안 되는 일은 항상 있을 거야. 인간이 어울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돌아가는 걸까?



[프로세스 대로만 하는 건 무능한 것?]

프로세스를 잘 지키고, 공정하게 일처리 하면서 성공하는 조직.
2022년, 세상이 이 정도 발전했다면 그런 조직이 많아져야겠지만 생각과 현실은 늘 거리가 있습니다.

제품 개발에는 수많은 절차가 있습니다.
기획하고, 설계하고, 만들고, 평가하고, 검증받고, 홍보하고, 판매하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이 발생합니다.

공표된 프로세스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절차를 표기하는 순서도가 사내에 공유되어 있어요. 일하는 사람들은 절차를 지켜 자기가 맡은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끝까지 그렇게만 하면 일이 마무리될까요?
거의 그렇지 않습니다.
프로세스대로 차근차근 업무를 진행하면 일정이 지연됩니다. 처음부터 일정은 돌발상황을 감내할 버퍼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품 개발 프로젝트 중 홍보자료 취득 업무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외부기관을 통해서 자료를 검증받아야 하는 일이었고, 해당 기관 담당자와 수차례 회의를 했습니다.

"저희도 내부 검토를 하고, 위에 승인받으려면 두 달이 소요됩니다. 일정 넉넉히 주셔야 해요."
"아, 부장님, 저도 아는데요. 저희 출시 전에 자료가 나와야 해요. 그전에 좀 안될까요?"
"저도 곤란해요. 회의가 4주마다 있는데 그 회의 끝나고 상부 승인받고 하려면 시간이 걸려요. 검토할게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길래 신청을 미리 하셨어야죠"
"알죠. 잘 알죠. 그런데 저희도 시제품 테스트가 끝나야 신청이 가능하니까요. 출시 일정이 빠듯하게 잡혀서 그래요. 죄송해요."
"일단 회의하고 최대한 해볼게요. 장담은 못합니다."
"잘 좀 부탁드릴게요."

홍보자료를 받는데 두 달이 걸린다는 보고를 했지만 우리 회사 본부장은 코웃음을 쳤죠.
"아, 걔네 항상 그래. 닦달 좀 해. 검토만 하면 되는데 두 달은 무슨 두 달이야. 박차장이 잘 좀 얘기해 봐"

업무 일정을 보고 했을 때,
그래 그 정도 걸린다고? 알았어. 기다려보자.라는 반응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일정을 당겨라, 비용을 깎아라, 등의 주문이 이어집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보채고 윽박지르면 일정도 빨라지고 비용도 줄어드는 것이 보통이니까요. 저쪽에서도 깎을 것을 대비해서 여지를 남겨두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모두 여지를 남겨두고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어느 한쪽이 정확하게 계산해 버리면 세계가 삐걱거립니다. 모두 여지를 둬야 에누리가 가능하고 그래야 손해보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하니까요.

결국 홍보자료 담당자에게 매일 안부인사처럼 전화를 걸어 애원을 했죠. 어느 날은 휴가 중인 사람에게 전화를 해서 진상을 떨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4주 내에 자료를 받았습니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팀원들과의 회식자리에서 공공연하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홍보자료가 양산 전에 나와서 미리 배포된 게 흔치 않아. 박차장이 아주 그냥 지긋지긋하게 물고 늘어졌잖아. 고생했어."

칭찬받아 기분이 좋으면서도 그 소리를 하는 본부장의 입을 꼬집어주고 싶었습니다.
다음에는 기필코 초반부터 일정을 넉넉히 잡으리라고 결심을 했습니다. 물론 결심은 지켜질 수 없었죠.

막무가내로라도 일을 성사시키면 칭찬받는 것이 절차가 성립되지 못했던 과거의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감정 소모 없이, 개인적인 미안함 없이 모두가 프로세스대로 일처리를 한다면 이 세상의 스트레스가 백분의 일로 줄어들 것이 분명하지만 영원히 희망사항으로 남는 일이겠죠?


아빠가 사오신 트레일러 장난감, 동생과 내가 절대로 가지고 놀지 못하게 했던 엄마의 노력 덕분에 아직도 튼튼하게 잘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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