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세스만 착실히 지키면 되는 날을 바라며
1979년, 이라크 팔루자
2022년 서울, 박기사님 자택
[프로세스 대로만 하는 건 무능한 것?]
프로세스를 잘 지키고, 공정하게 일처리 하면서 성공하는 조직.
2022년, 세상이 이 정도 발전했다면 그런 조직이 많아져야겠지만 생각과 현실은 늘 거리가 있습니다.
제품 개발에는 수많은 절차가 있습니다.
기획하고, 설계하고, 만들고, 평가하고, 검증받고, 홍보하고, 판매하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이 발생합니다.
공표된 프로세스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절차를 표기하는 순서도가 사내에 공유되어 있어요. 일하는 사람들은 절차를 지켜 자기가 맡은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끝까지 그렇게만 하면 일이 마무리될까요?
거의 그렇지 않습니다.
프로세스대로 차근차근 업무를 진행하면 일정이 지연됩니다. 처음부터 일정은 돌발상황을 감내할 버퍼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품 개발 프로젝트 중 홍보자료 취득 업무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외부기관을 통해서 자료를 검증받아야 하는 일이었고, 해당 기관 담당자와 수차례 회의를 했습니다.
"저희도 내부 검토를 하고, 위에 승인받으려면 두 달이 소요됩니다. 일정 넉넉히 주셔야 해요."
"아, 부장님, 저도 아는데요. 저희 출시 전에 자료가 나와야 해요. 그전에 좀 안될까요?"
"저도 곤란해요. 회의가 4주마다 있는데 그 회의 끝나고 상부 승인받고 하려면 시간이 걸려요. 검토할게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길래 신청을 미리 하셨어야죠"
"알죠. 잘 알죠. 그런데 저희도 시제품 테스트가 끝나야 신청이 가능하니까요. 출시 일정이 빠듯하게 잡혀서 그래요. 죄송해요."
"일단 회의하고 최대한 해볼게요. 장담은 못합니다."
"잘 좀 부탁드릴게요."
홍보자료를 받는데 두 달이 걸린다는 보고를 했지만 우리 회사 본부장은 코웃음을 쳤죠.
"아, 걔네 항상 그래. 닦달 좀 해. 검토만 하면 되는데 두 달은 무슨 두 달이야. 박차장이 잘 좀 얘기해 봐"
업무 일정을 보고 했을 때,
그래 그 정도 걸린다고? 알았어. 기다려보자.라는 반응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일정을 당겨라, 비용을 깎아라, 등의 주문이 이어집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보채고 윽박지르면 일정도 빨라지고 비용도 줄어드는 것이 보통이니까요. 저쪽에서도 깎을 것을 대비해서 여지를 남겨두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모두 여지를 남겨두고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어느 한쪽이 정확하게 계산해 버리면 세계가 삐걱거립니다. 모두 여지를 둬야 에누리가 가능하고 그래야 손해보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하니까요.
결국 홍보자료 담당자에게 매일 안부인사처럼 전화를 걸어 애원을 했죠. 어느 날은 휴가 중인 사람에게 전화를 해서 진상을 떨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4주 내에 자료를 받았습니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팀원들과의 회식자리에서 공공연하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홍보자료가 양산 전에 나와서 미리 배포된 게 흔치 않아. 박차장이 아주 그냥 지긋지긋하게 물고 늘어졌잖아. 고생했어."
칭찬받아 기분이 좋으면서도 그 소리를 하는 본부장의 입을 꼬집어주고 싶었습니다.
다음에는 기필코 초반부터 일정을 넉넉히 잡으리라고 결심을 했습니다. 물론 결심은 지켜질 수 없었죠.
막무가내로라도 일을 성사시키면 칭찬받는 것이 절차가 성립되지 못했던 과거의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감정 소모 없이, 개인적인 미안함 없이 모두가 프로세스대로 일처리를 한다면 이 세상의 스트레스가 백분의 일로 줄어들 것이 분명하지만 영원히 희망사항으로 남는 일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