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귀국

나보다 열세 살 어렸던 부모님에게

by 춘춘

우리 과 졸업여행은 수년간 제주도였습니다.

어학연수 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해외여행이 활발하지 않던 시절이라서 처음 비행기를 타보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저도 비행기가 처음이었습니다.


스무 명 정도의 인원이 공항 입구에 모였고, 과 대표 선배가 표를 나눠주었습니다.


"형! 이거 제 이름 아닌데요?"

"어, 괜찮아. 그렇게 됐대. 조용히 하고 그냥 표 내면 돼."


우리가 받은 표에는 우리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이 쓰여있었습니다. 여행사에서 어떤 이유로 탑승객을 바꾼 모양인데 그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막판에 취소될 표를 저렴하게 구입했거나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벌써 20년 전의 일입니다. 모든 것이 실명화된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고 황당하죠.

아빠가 이라크 파견을 마치고 돌아오던 해는 40년 전이었으니 그때는 더 체계가 없었을 거예요.




박기사님 이야기 6편

1980년, 이라크를 떠나며


모두 들떠 있었다.

박기사는 귀국일자가 채 한달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꿈만 같았다. 장거리 운전을 마치고 내무반에 돌아와 침상에 피곤한 몸을 뉘였다. 며칠 바깥잠을 잤는데도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조용히 일어나 사물함을 열고, 아내가 보내준 딸아이 사진을 봤다. 떠나올때 한두 발짝 어설프게 떼던 아기였는데 어느 새 제대로 신발을 신고 아장거리는 모습이다.

떠날 날짜를 받아 놓은 사람들은 모두 싱숭생숭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짐을 고쳐 싸느라 바쁘다. 가끔 이라크 시내에 나가서 사 모았던 자잘한 물건들을 다시한번 단단히 포장한다. 조악한 것들도 많지만 한국에서 보기 힘들 물건들이라 가족들에게 줄 생각에 미소가 번진다.


올때와 비교해도 별로 늘지 않은 짐을 챙겨들고 버스앞에 섰다. 이제 정말 집으로 돌아간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올때 경로의 역순이었다. 버스를 타고 육로로 이동, 국경을 넘어 쿠웨이트 도착, 쿠웨이트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바레인과 홍콩을 경유해서 김포에 도착하는일정이다. 도착 날짜는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날이라는 안내를 받았다.

쿠웨이트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 인원은 모두 16명이었다. 박기사는 옆자리에 앉은 윤기사의 어깨를 괜히 툭 쳐본다. 고단했던 지난 1년간 그나마 이 친구가 있어 자주 웃을 수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 김포까지 근로자들을 인솔하기 위한 관리과 이대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레인에 도착한 일행은 몇 시간 후 CPA 항공기를 타기로 되어있었다. 박기사는 남는 시간에 공항에서 아내에게 줄 선물을 사고 싶었다. 봉급 외에 생필품 구입용으로 받은 소액을 쪼개서 만들어 둔 비상금으로 가족에게 줄 선물을 사느라 다들 바빴다.

박기사도 쿠웨이트 공항에서 여행용 가방과 딸아이 장난감을 샀지만 도통 아내 선물은 뭘 사야할지 몰라서 우물대느라 시간만 버리고 말았다.

몇몇 동료들이 악세서리 상점에 가길래 박기사도 따라갔다. 반짝이는 금은 보석들 사이로 가늘지만 단정해보이는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목걸이 중앙에는 팬던트 대신 두개의 금줄이 작은 나뭇가지처럼 뻗어나와있고, 두 줄 끝에 손톱 반쪽만한 하트가 달려있었다. 엉겁결에 고른 하트 목걸이가 볼 수록 마음에 들었다. 결혼반지 말고는 사본적이 없는 여자 악세서리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봤다. 목걸이를 들어올릴때마다 금줄에 달랑달랑 매달려 반짝이는 하트 두개가 귀여웠다.


이제 탑승 시간을 기다렸다가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느긋해진 근로자들은 대기석에 앉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서로의 가족 얘기를 다시 한번 나눴다. 아내와 아이들 얼굴을 떠올리며 선물까지 준비하자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그때 CPA 항공사 직원 한명이 박기사 일행에게 다가왔다. 전달할 사항이 있다며 관리과 이대리를 한켠으로 데려갔다. 직원의 말을 듣는 이대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비행기가 연착이래요. 내일까지 출발 못한다고 하네요.”

연착이라는 말만 했지 내일 몇 시 출발인지, 오늘 밤은 어떻게 보내야 하는건지 아무런 설명도 없이 휙 떠나버린 항공사 직원 뒤통수만 바라보며 이대리도 얼굴만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화가 난 근로자들은 너도나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명색이 관리과 직원인데 가만히 있을수는 없었던지 여기저기 전화도 해보고, 외국 직원들과 얘기도 나눠보는데, 영어를 모르는 박기사가 옆에서 봐도 통화하는 본새가 어설프다. 별 소리 없이 안절 부절 하는걸 보니 딱히 답을 얻지 못한 모양이다.


아무런 안내 없이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흥분했던 근로자들도 말 없이 바닥만 멀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은 갈 수 있는건가.”

누군가 중얼거리자 모두들 자기 생각이 읽히기라도 한듯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만히 기다리는 사람도 있지만 참지 못하고 출구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박기사의 절친 윤기사가 그런 사람이다.

“거, 맨날 영어소설 옆구리에 끼고 다니드만 이대리도 여기서는 안통하나 보네. 가만히 있어봐라. 내가 송출과장한테 전화좀 해볼게.”

바지를 탈탈 털며 일어나는 윤기사의 등판을 일행은 응원의 눈길로 바라봤다.


십여분 쯤 후에 나타난 윤기사는 일행에게 오기도 전부터 입을 달싹거리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뭘 알아오긴 했나보다.

“아, 글쎄, 누가 우리 비행기표를 팔아먹은거래요. 오늘 비행기를 타면 홍콩에서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낼수 있으니까 웃돈 받고 바꿔치기 한거 같다는데요?”

성질 급한 몇몇 근로자들이 항공사 창구에 파견된 한국인 직원을 찾아내 문의를 했다. 입으로는 그런일은 절대 없다면서도 당황하는 눈치다.

아까와는 태도가 달라진 것을 보니 걸리는게 있기는 한 모양이다. 공항 대기실에서 잘수 있도록 편의를 봐 주고, 식사도 제공해 주겠다고 했다.

표를 돌려받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다음날 출발시간 안내까지 받고나자, 근로자들의 불만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일년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순탄지 못할까봐 불안했던 마음들에게 형편없는 보상은 배려로 받아들여졌다.


바레인 공항에서의 소란이 지나가고 일행은 무사히 비행기를 탔다. 드디어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려 힘차게 이륙했다. 홍콩에서 갈아 탄 비행기는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 영공으로 들어왔다.

이제 귀국이다. 공항에 마중나온 가족들을 만날 생각에 근로자들의 가슴은 다시한번 두방망이질을 쳤다.


착륙을 기다리며 설레던 그들에게 예상치 못했던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기상 악화로 인해 현재 착륙이 불가능합니다. 상공에서 대기 후 기상이 안정되면 착륙할 예정이니 자리에서 대기해 주시기를 …… “

눈이 너무 많이 온 탓에 착륙할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한국 상공에서 3시간을 대기했지만 결국 그날 김포 착륙은 불가능했다. 비행기는 나리타 공항으로 회항하여 임시로 일본에 착륙했다. 기상상태를 본 후 김포로 돌아와야 한다는 안내방송이 다시한번 기내에 울렸다.

그리고 공항으로 마중을 나온 가족들은 두번째 헛걸음을 해야 했다.

-

드디어 눈보라가 걷히고 근로자들을 실은 비행기는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박기사의 아내는 두번의 헛걸음끝에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 일년만에 만난 딸 아이는 엄마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인 듯 박기사를 빤히 쳐다만 봤다.

아기였던 딸이 말도 하고 걷기도 하는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만보던 박기사는 흰 이를 모두 드러내고 환히 웃으며 아이를 안았다.


며칠 전 태국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코로나 발생 이후 첫 출장이었어요.

3년 만에 가 본 공항은 많이 달라져있었습니다.
키오스크에서 셀프 체크인을 하고 나면 수하물 위탁을 자동으로 하게 되어있는 라인에 줄을 섭니다. 셀프 드롭 백이라고 하는 자동 수하물 위탁 기기에 가방을 올리면 짐 무게가 표시되고 가방에 붙일 수 있는 기다란 스티커가 출력되고요. 스티커를 떼어서 여행가방 손잡이에 붙이고 문을 닫으면 끝입니다.
기계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도와주는 분들이 한두 분 계시긴 했지만 예전처럼 지상 근무 항공사 직원을 만날 일이 없었습니다.

요즘은 항공사 앱을 이용하면 좋은 자리도 미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나마 컴퓨터로 할 수 있던 것이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단번에 되더라고요.

스마트폰이 나온 이후로 외국 여행이 수월해졌습니다. 이번에도 태국에서 스마트폰만 켜면 내 집 앞처럼 훤히 길을 찾을 수 있었어요.

유튜브며 블로그며 쌍방향으로 생성해 놓은 엄청난 정보 덕에 어느 골목에 현금 출납기가 있는지, 어느 슈퍼에서 콩알 치약을 조금 더 싸게 파는지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세상 많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하면 언제 적 소리를 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 오래전 세상이 바로 우리 부모의 젊은 날들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이렇게 큰 변화를 격은 세대가 또 있었을까요?

혼란스러웠던 아빠의 귀국얘기를 들으며 한편으로는 엄마가 생각났습니다.
출장 갔다가 1년 만에 돌아오는 남편이 입국장에 보이지 않을 때, 두 번이나 공항에 헛걸음을 하면서 젊은 아내는 얼마나 불안했을까요?

공항에서 애태우고 있던, 나보다 열세 살 어린 엄마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고 싶습니다.

엄마, 아빠 잘 도착할 거야. 이틀 후면 볼 수 있어. 안심해.
어릴적부터 장식장에 있던 동물 인형들. 지금보니 동물들 배에 메이드인 홍콩이라고 쓰여있다. 아빠가 홍콩을 경유할때 사온 것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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