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고생도 익숙해지는 걸까?다시 사우디아라비아로

두번째 중동 파견, 엄마 화이팅!

by 춘춘

나와 동생은 어릴 적 사진이 많습니다.

아빠가 외국에 나가 계실 무렵은 나와 동생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던 영아기 시절인데요. 며칠 지나면 뒤집고, 얼마 지나면 기고, 또 몇 달 지나 걷고. 그 과정을 아빠가 볼 수 없었으니 엄마는 자주 사진을 찍어서 우편으로도 보내고 앨범에 간직해 었을 겁니다.


이라크에서 귀국한 지 1년이 지나지 않아 아빠는 다시 사우디아라비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박기사님 이야기 7편

1981년, 서울


이라크에서 돌아온 후 박기사는 560만원을 주고 개인택시 브리샤를 샀다.

택시를 해 보기로 마음 먹었을 때는 정부에서 주는 혜택을 받아볼 심산이었다. 정부에서는 무사고 운전자들을 대상으로 영업용 택시를 발급해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박기사도 조건이 맞을 것 같아 시도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약간의 이력이 부족해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다.


다른 일자리를 찾아 보았지만 운전하는 일 중에서는 택시가 제일 나을 것 같았다. 택시는 움직이는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 잘만 하면 차근차근 돈이 모일 거라고 생각했다.

대출을 조금 받아서 현찰로 택시를 사고, 몇달 일을 해보니 매일 들어오는 수입이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몇년 성실히 벌면 내집 장만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부지런히 몸을 놀렸다.


박기사가 택시 영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동지역 불안정으로 인한 오일쇼크가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기름값은 그 전부터도 오르고 있었으나, 영업한지 10개월쯤 지나자 천정부지로 솟았다. 기름값을 채우고 하루 목표 수입을 벌기 위해 택시기사들은 업무 시간을 더 늘려야했다. 손님을 많이 태우지 못하면 오히려 택시 운행을 하고도 적자를 보는 날이 허다했다. 무리해서 일을 하던 동료들 중에는 건강을 잃어 그나마 하던 운전 일을 아주 못하게 된 사람도 있었다.

움직이면 눈앞에 돈이 보이니 박기사도 퇴근을 할 수가 없었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손님을 태웠다. 기름값은 나날이 높아져 근무시간을 늘리는데도 수입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날도 새벽부터 서둘러 나와 영등포에서 손님을 태웠다.

“어서 오세요.”

“잠원동 롯데건설이요.”

눈인사를 하려 백미러로 손님을 보던 박기사는 멈칫했다. 거울로 눈이 마주친 기사와 손님은 서로를 알아봤다. 박기사가 이라크에 있던 시절, 중기 관리를 하던 관리부장이었다.


“아니 이게 무슨일이야. 이렇게 만날수가 있나. 잘 지냈나?”

“예, 안녕하셨어요? 참 신기하네요.”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타국에서 고생하며 함께 일했던 사람을 생각지 않게 만나고 나니 두 사람모두 반가운 마음에 악수한 손을 한참 놓지 못했다.

둘은 영등포에서 잠원동으로 이동하는 내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관리부장은 이라크에서 돌아온 후 롯데건설로 자리를 옮겨 중기부장 자리에 있다고 했다.


“나는 곧 다시 나가.”

“이라크에요?”

“아니, 이번엔 사우디아라비아로 파견가.”

“아이고, 또 멀리 가시네요.”

“그러게. 이렇게 우연히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 헤어지기가 아쉽네. 나 사우디가기 전에 만나서 소주한잔 하자고.”

“좋죠.”


며칠 후, 박기사는 족발집에서 중기부장을 다시 만났다.

“박기사, 택시 때려치우고 사우디 같이 가자. 한 15일 이내로 회사에 얘기해 놓을테니까 같이 가. 내가 중기 구매 담당으로 간다고. 추레라 기사가 필요해. 현장에서 중기 구매를 하면 추레라로 물건을 실어 날라야 되잖아. 기사야 구할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만 내 심복 하나쯤 데리고 가면 내가 든든하지. 믿을만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내가 박기사 봐 와서 잘 알잖아. 가서 나 좀 도와줘. 같이 가자."


박기사 입장에서도 대충 벌이가 얼마나 될지 들어보니 여기서 택시기사를 계속 하는 것 보다 나을 것 같았다.


“어때, 의향 있냐?”

“예, 좋습니다.”

박기사는 그 자리에서 수락을 해 버렸다.


중기부장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박기사의 눈앞에 가족들 얼굴이 어른거렸다. 딸은 이제 겨우 얼굴을 익혀 아빠에게 매달리기 시작했고, 아내의 뱃속에는 둘째가 자라고 있었다. 어머님까지 아내에게 맡기고 또 다시 떠나려니 심정이 착찹했다.

일이 힘들기는해도, 저녁마다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집 밥을 먹고, 딸래미 자라는 것을 보기 시작한지 일년도 안됐는데 또 가족들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기 싫은 마음도 굴뚝 같았다.


하지만 택시 일은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주변에는 중동 건설현장에 가고 싶어도 못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중기부장을 우연히 손님으로 태운것이 기회라면 기회였다.


박기사는 며칠내로 택시를 팔고 출국 준비를 했다.


박기사님 인터뷰

2022년 서울, 박 차장 집에서 차 한잔 하며


박 차장 : 이라크에서 그렇게 힘들었는데 왜 또 간 거야?

박기사 : 택시기사 하는 게 너무나 힘이 드는 거야. 연료 파동 때문에 기름값이 비싸가지고, 하루에 만 원 벌면 오천 원은 기름값, 오천 원으로 이것저것 때우고 나면 남는 게 없었지. 그래서 그 중기부장 만나고 나서 보정동 가서 개인택시를 팔아버렸어. 560주고 산 개인택시를 10개월 만에 660 받고 팔았어. 아침에 나갔다가 팔아가지고 집에 왔더니 니 엄마가 좀 울었지.

박차장 : 아니, 아니. 엄마한테 말도 안 하고 팔았어? 상의도 안 하고?

박기사 : 상의는 했겠지.

박차장 : 어.... 제대로 안 했을 거 같은데? 그거는 엄마한테 물어봐야겠다. 분명히 황당할 만큼 맘대로 팔았을 거 같은데.

박기사 : 거 뭐. 근데 사우디는 이라크만큼 돈을 못 벌었어. 한국에 돌아왔을 때 다시 택시를 사려니까 배로 뛰어버렸더라고. 그때는 가스차가 나와가지고 택시가 돈벌이가 좀 되는 거야. 그러니까 사우디 가서 번 돈 다 해도 택시를 못 사겠더라고. 그래 가지고 그다음에 운수회사에 트레일러 기사로 들어간 가지.


[우리보다 강했던 30대 여성, 엄마세대]

나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습니다.
회사에 다녀야 했으니 엄마가 애를 봐주셨어요. 평일에는 거의 엄마한테 맡기고 주말에만 데리고 있는데도 목욕시키고 먹이는 것이 힘에 부쳤습니다.

"아이고, 애 하나 데리고 뭘 그렇게 징징대냐."
직장에 다니는 것은 그것대로 안쓰러워하는 엄마였지만 내가 하나뿐인 애를 어쩌지 못해 쩔쩔매는 것을 보고 있자면 한숨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툴툴대면서도 엄마네 젊었을 때는 지금보다 힘들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돌이켜보면, 엄마는 어린 나와 동생을 데리고 공중목욕탕을 다녔었네요. 혼자서 두 애들 떼를 다 밀어주고, 자기도 목욕을 했습니다.
우리 빌라 이층에 사는 아줌마는 딸이 셋이었습니다. 그 아줌마는 세 딸을 데리고 목욕탕을 다녔죠. 그 집 막내는 더 어려서 아장아장 걸어 다녔으니 열 살도 안된 애들 셋을 혼자서 목욕시켰을 겁니다.

엄마의 삼십 대 초반은 고단했습니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은 홀어머니와 갓 낳은 애를 맡겨두고 이라크로 떠나버렸죠. 나에게는 다정한 할머니였지만 결코 쉽지 않았던 시어머니를 모시고, 갓난아기 독박 육아를 일 년간 한거에요.

이라크에서 돌아온 남편은 둘째 아기를 임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났습니다.
택시기사보다 벌이가 나을걸 알고 있으니 말릴 수가 있나요, 원망을 할 수가 있나요.

철마다 고추장, 된장, 간장, 김치 다 담가먹고, 아기 기저귀 손빨래하고, 삼시세끼 장 봐다가 식구들 밥 해 먹였던 그 때의 엄마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냅니다.
아빠에게 보내졌을 내 사진들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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