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울지 않았던 이유
아는 세계만큼 공감하는 것
열세 살 아들과 주말마다 드라마를 봅니다.
응답하라 시리즈부터 시작해서 유명한 것들을 골라서 보고 있는데요. 제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아들과 같이 보면서 즐기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볼 때였어요. 한 편 볼 때마다 저와 남편은 두어 번씩 우는데요. 아들은 그다지 슬퍼하지 않는 거예요.
특히 장성한 아들이 심장 수술 후 깨어나지 않자 늙은 부모님이 아들 가슴 위로 배냇저고리를 올려놓으며 울면서 일어나라고 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 장면에서 저와 남편은 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아들은 슬프기는 해도 울 정도는 아니라면서 우리가 우는 모습을 재밌어했습니다.
저는 은근히 걱정이 됐어요.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공감 능력이 없는 걸까? 하고요.
그래도 드라마 전반을 보는 이해력에는 문제가 없고, 본인도 재미있어해서 드라마 보기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갯마을 차차차'를 보던 중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주인공을 돌봐주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장면이 나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주인공에게 옥수수를 주었었는데 그 밑에 남겨두었던 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할머니가 남긴 편지를 읽으면 주인공이 펑펑 우는 장면이 정말 슬펐어요.
그런데 그 장면에서 제 아들이 엉엉 우는 겁니다.
"이거 만큼 슬픈 건 없는 거 같애."
이러면서 너무 울어서 보고 있는 저와 남편은 웃기기까지 했습니다.
나중에 얘기해보니 아들은 자신의 할머니들이 생각났다고 해요. 제가 맞벌이를 해서 저희 엄마와 이모가 아들과 조카를 키워주셨거든요. 외할머니와 이모할머니가 돌아가시는 생각이 나서 너무 슬펐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공감은 아는 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을요.
아직 열세 살 먹은 소년에게 자식을 잃는 슬픔은 부모인 우리만큼 크게 와닿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반면에 부모님이 죽는 장면, 할머니가 죽는 장면에서는 아들도 저희와 똑같이 슬픔을 느끼더라고요.
가끔 동생이 아픈 내용이 나오면 자기 사촌 동생이 아플까 봐 걱정하기도 하면서요.
완전히 경험하지 않은 세계를 공감하는 것은 어려운 것인가 봅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의 입장으로 치환시켜봐야 완전한 공감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성인이 되면서 생각이 깊어지고 입장을 바꾸는 능력이 자라면 경험하지 않은 일에도 공감할 수 있게 되지만, 한계는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겪지 않은 일을 위로할 때 충분히 공감한다고 하는 것도 착각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해하는 것과 느끼는 것이 다른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