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시간은 약속이 아니다.
결국 절제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
'주말, 하루에 40분씩 3회에 나눠 할 수 있음'
아들에게 게임시간은 정해져 있다.
타이머를 40분으로 맞춰놓고 게임을 하다가 알람음이 울리면 스스로 끄고 게임을 마쳐야 한다.
한창 몰입해있는데 알람 소리가 났다고 해서 게임을 꺼버리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하고 있던 게임은 마무리하고 끄는 것이 인정되고 있다.
그것을 인정해 주는데도 아들이 가끔 게임이 끝나지 않은 척하면서 한게임 더 이어서 한다.
그 마음이 백번 이해가 간다.
넷플릭스로 드라마에 영혼까지 빨려 들어가 있는데 갑자기 시간이 다됐으니 다음 편을 보지 말라고 한다면 어른들도 금단현상에 잠깐 이성을 잃는다.
결정적인 순간에 드라마가 끊기고 '다음 이 시간에'가 뜨면 자연스럽게 욕이 나왔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래도 게임은 최대한 몰입도를 낮춰야 하고, 나이 들면 이마저도 먹히지 않을 것이라 지금은 시간을 정해놓고 있는 것이다.
그런 아들이 알람이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10분 이상 게임을 더 하고 있을 때 남편은 혼을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 남편에게 동의할 수 없다.
먼저, 게임 시간은 엄밀히 말하자면 약속이 아니다.
"우리 3시에 만날까?"
"아니, 4시에 만나자."
"그래 그러자."
이런 게 약속이다.
앞으로 그렇게 하기로 상호 합의한 것이 약속이다.
게임시간은 부모의 강요로 인한 규칙이다.
물론, 탐탁지 않은 약속도 했다면 지켜야 한다. 어려서부터 약속한 것을 지키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게임에 대한 약속은 그 법칙을 따를 수 없다.
약속이라는 제도로 묶기에 게임은 너무 중독성이 있다. 성인도 의지로 조정하기 어려운 마약 같은 성질을 띠고 있다.
더구나 게임시간을 정하는 아들은 이성적인 판단하에 조건을 제시할 만큼 성숙하지 않다. 머리와 마음으로 동의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들이 원하는 것은 하루 종일 게임하는 것이다. 하루에 세 번 40분씩 해야 한다는 규칙을 정할 때 아들은 자의로 동의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 종일 하게 해 줄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부모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뿐이다.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나는 게임 관리가 자기 전에 양치질을 해야 하고 밥 먹을 때 돌아다니지 말아야 한다는 규칙을 배우는 과정과 같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한 번에 지키기 어려울 것이고, 자꾸 어기고 싶어질 것이다. 양치질하기 싫어하는 아이한테 화를 낼 수는 있지만 약속을 어겼다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양치질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습관이 들지 않으면 지키기 어렵다.
게임시간도 매번 반복해서 말해주어야 한다.
아들이 게임 시간을 지키는 것은 미래에 스스로 자신을 조절하면서 게임을 즐기기 위한 훈련과정이다.
부모를 위해, 부모가 화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게임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모와 약속한 것이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느 순간 지켜야 할 동기가 약해진다. 자신이 절제력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부모와의 약속 때문이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해하고 동의해야 억울함 없이 규칙을 지킬 수 있다.
"평생 게임을 즐기며 중독되지 않기 위해 훈련하는 과정이다. 너는 그럴 만한 의지가 있는 사람이다."
나도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고 있는 아들을 보고 있으면 복장이 터진다. 그래서 화내지 않고 반복해서 말해줄 수 있는 부모가 되기 위해 매일 노력한다.
이 대화가 늘 평화롭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아들은 자신이 자유롭게 풀어주어도 충분히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곤 한다.
그럴 때 의지로 하기 힘든 중독에 대한 얘기를 조금씩 들려준다. 분노한 상태에서는 아무 얘기도 들리지 않으니 말이 통할만 한 시점을 노리는 것도 중요하다.
얘기가 잘 될 때도 있고 잘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도 기분 좋은 틈을 노려서 반복한다.
결국 조절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