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8. 자판기 커피를 내밀며...

사라지는 물건들, 짙어지는 추억들

by 춘춘

평생 마신 자판기 커피가 천 잔쯤 될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핑계로 한잔씩 뽑아 마신 게 3백 잔은 될 겁니다.

대학에 다닐 때는 건물 곳곳을 돌아다니며 틈만 나면 마셨어요. 방학을 제외하고 4년 치를 합하면 하루에 두 잔만 먹었다고 해도 천 이백 잔은 되니까, 천 잔이 뭡니까, 이천 잔은 마셨겠어요.


그 많은 자판기 중 인생 자판기 일, 이, 삼위를 꼽아보라면 저는 꼽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3 때 다니던 독서실 앞 자판기입니다.

휴게실 앞 자판기에서 커피를 마시며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창밖으로 보이는 편의점에 라면을 먹으러 가는 것이 코스였습니다. 독서실 칸막이 자리에 앉아서 공부할 때, 자박자박 발소리를 내며 다가온 친구가 '커피 한잔?' 하면 어찌나 반가웠는지요. 어두컴컴한 휴게실에 앉아 얘기하던 시간이 좋아서 독서실에 가는 게 지겹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제 아들이 자라서 독서실에 다니겠다고 하면 말리든지, 라면 먹으러 가려니 하고 마음을 비우든지 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대학교 도서관 열람실 앞 커피 자판기입니다.

저는 공부를 열심히 했던 학생도 아니면서 허구한 날 도서관에 가 있었습니다. 도서관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고, 그곳에서 소설책을 빌려 보느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정작 시험기간이 되면 시험 준비를 한답시고 모여드는 동기들, 선후배들을 만나 자판기 앞 계단에 앉아 노닥거리던 시간이 공부 시간과 맞먹었을 거예요.

너 또 여깄냐?라는 말을 매일 들었어요.

학생 식당에서 천 원짜리 밥을 먹고 백오십 원짜리 커피를 뽑아 들고 계단에 앉아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중에 회사에 가서는 담배 피우는 동료들 옆에서 간접흡연을 하는 것이 그렇게 불쾌할 수 없었는데, 그 시절에는 담배 피우는 친구들 옆에서 한 시간을 떠들어도 그 냄새가 그렇게 싫지 않았어요.


마지막 제 인생 자판기는 집 앞에 있던 자판기였습니다.

집 바로 앞에 자판기가 있는 경우는 드물 텐데요.

저희 집 앞에는 택시회사가 있었어요. 택시 기사님들이 대기하면서 드시려고 설치해 놓은 기계인데 동네 사람들도, 등산하러 뒷산에 올라가는 사람들도 뽑아 마시곤 했습니다.

저는 주로 늦은 밤, 집에 데려다주던 남자 친구와 함께 그 자판기를 이용했습니다. 연애할 때는 집에 들어가기 직전이 가장 아쉽잖아요. 헤어지기 전에 자판기 앞에 서서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안녕 인사를 나눴어요.

택시회사 자판기 커피를 백 잔쯤 마시고 나서 남편과 결혼한 것 같습니다. 그때는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았던 걸까요.

헤어지기 아쉬워서 종이컵에 든 커피를 아껴 마시면서 들어갈 시간을 미뤘던 거겠죠.

요즘 남편을 보면 자판기 앞에서 끝도 없이 얘기를 나누던 그 남자가 맞나 싶습니다.


몇 년 전에 택시회사 앞 자판기는 자취를 감췄습니다. 아마도 택시회사 사무실의 믹스커피와 정수기에 밀려난 것 같아요.


지금도 친정집 앞에 자판기가 있던 자리를 보면 남편과의 추억이 떠오릅니다. 물론 그 전 남자 친구들과의 추억도 슬쩍 떠오르지만 남편이 알 필요는 없죠. 자판기도 비밀을 안고 떠났으니까요.


자판기 커피를 마셔본 지 십 년은 넘은 것 같습니다.

지하철 역에 비치되어 있는 기계 말고, 길에서 커피 자판기를 만나기는 힘들어졌습니다. 어쩌다가 오래된 식당 골목 같은 데서 커피 자판기를 보면 가슴이 울렁 하면서 반갑기도 합니다. 사라지는 물건들이 많아질수록 추억은 짙어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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