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10. 맛없는 커피의 효과
입맛이란 간사하고 어리석은 것
회사에 들어갈 때까지도 아메리카노 맛을 잘 몰랐어요.
진한 커피는 한약 같고 흐린 커피는 결명자차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주로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 커피숍이다 보니 늘 커피를 마시긴 했습니다. 커피숍에서도 맥심 믹스커피를 팔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요.
제가 신입사원이던 시절, 저희 회사 지하에는 '더박스'라는 작은 카페가 있었습니다. 주변에 커피숍이 없어서 서너 개 건물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커피 구매를 독점하다시피 하는 곳이었어요.
커피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은 늘 더박스의 커피맛이 불만이었습니다. 이 정도 커피맛으로 이렇게 장사가 잘되는 건 오로지 자리값이라고 하면서요.
저는 매번 가장 싼 아메리카노를 시켜 먹으면서 쓴 커피가 다 똑같지 뭐,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유 들어간 라테도 맛없긴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어느 날 외부에서 친구를 만날 일이 생겼습니다.
입사 후 저녁이면 야근을 하고 주말이면 밀린 휴식을 취하느라 한동안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었지요.
약속 장소는 삼성역 코엑스몰에 있는 파스쿠찌였습니다. 모처럼 사람들이 북적대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에 방문한 거예요. 그리고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습니다.
친구와 자리에 앉아 수다를 떨다가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받아왔는데요. 무심코 한 입 마셨다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너무 맛있었습니다.
분명히 전에는 파스쿠찌 커피는 다른 커피보다 더 쓴 것 같아 맛이 별로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그날 한 모금 마신 파스쿠찌 커피는 달랐습니다. 입안 가득한 커피 향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습니다.
커피 안에 이렇게 오묘한 맛과 향이 있었던가. 쓴맛이 쓴 게 아니라 고소하게 느껴졌어요.
파스쿠찌가 달라진 게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더박스 커피로부터 너무 학대를 당했던 겁니다.
거의 아무 향도 나지 않고 쓰기만 했던 더박스 커피를 매일 먹다 보니 향기가 풍부한 원두커피를 마셨을 때 만족도가 극대화되었던 거예요.
다방커피 같이 달지 않아도 아메리카노가 맛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렇게 아메리카노에 길이 들기 시작하면서 커피맛을 알게 되었고, 지금은 아침마다 사무실에서 아메리카노를 먹습니다.
맛없는 더박스 커피로 단련되는 기간이 없었다면 입맛이 예민하지 않은 제가 커피맛의 차이를 강렬하게 느낄 일이 없었을 거예요. 좋은 거 자꾸 해주면 버릇 나빠지듯이 입맛도 고생을 좀 해봐야 좋은 게 좋은 줄 아나 봅니다.
저의 입맛을 혹독하게 훈련하여 커피맛을 알게 해 준 더박스 커피는 이제 건물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커피값이 천구백 원이었고, 주인아주머니가 직원들과 말을 놓을 만큼 친근한 곳이었습니다. 한 번도 한 적은 없었지만 리필도 무한정해주는 곳이었고요.
못살던 시절이 아련하게 떠오르듯 가끔 더박스가 생각납니다.
지금 그 자리는 프랜차이즈 커피점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내가 에스프레소를 넣은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나 생각하면 늘 더박스가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