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덕분에 책을 좋아하게 됐어요.
학창시절 아빠가 툭 건네준 에세이들은 내 삶의 지표가 되어 지금도 힘든 결정을 할 때 힘이 되어 줍니다.
흥미로운 소설을 읽고 나면 이 이야기를 세상에서 나만이 알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토지,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삼국지를 읽으며 장엄하게 흐르는 물줄기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 같은 그 벅찬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때문인지 고 2 때 문과와 이과를 나눌 때 나는 역사학도가 될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역사공부를 해서 대하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취업하기 힘든 분야라는 말에 얇팍한 귀가 팔랑거려 금새 포기했지요.
그렇게 나는 과학도가 되었고, 지금도 그 일로 밥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직장도 적당한 시기에 구했고, 돈도 벌었고, 나름대로 내 직업도 사랑하며 20년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가끔씩 했어요.
대학에 들어가서도 문예창작과 수업을 챙겨 들으며 담너머 세계를 늘 동경했습니다.
그리고 마흔이 넘으니까 더 늦기 전에 진짜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나는 매일 새벽 출근 전에 혼자 책상에 앉아 두서없는 글들을 썼습니다. 나중에 읽어보고 형편없는 글 솜씨에 절망하기도 했고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인생 후반기에 찾은 풍요라고 생각하며 고통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아빠 얘기가 쓰고 싶어졌습니다.
내가 아주 어려서부터 들었던 아빠의 직업이야기.
그때는 몰랐는데 내가 어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돌이켜보니까 그 얘기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였어요. 아빠 얘기를 글감 삼고 싶어 기억나는 대로 기록해 주기를 부탁했습니다.
아빠의 원본을 가지고 사막의 이야기를 만들어 봤어요. 그때의 아빠와 주변 사람들을 상상하면서.
아빠의 문장은 간결하고 담백했어요. 역시 평생 책을 읽어온 아빠는 처음인데도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아빠였다면, 엄마였다면 그 세월을 견딜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아주 많이 들었습니다. 나보다 더 어렸던 아빠와 엄마가 그 시절을 버텨낸 것이 감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아빠가, 엄마가, 이모가 내 곁에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잊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문득 그대로 서서 지금의 감사를 붙잡으려고 노력하지만 또 어리석은 나는 그걸 그냥 흘려보내고 맙니다.
아빠는 그렇게 말하겠지. 다 그런 거라고. 사는 게 그런거라고 무심하게 말하겠지요. 아빠가 하는 무심했던 말들은 기억속에 스며들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불쑥 나타나 나를 단단히 받쳐줍니다.
나도 그런 부모가 될 거예요. 무심하게 하는 말들이 자식의 인생에 좋은 영향을 끼칠수 있는 그런 부모가.
아빠 건강의 위기가 한번 지나가고 나서 그렇게 즐기던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아빠가 안쓰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빠와 오래오래 같이 있고 싶은 딸은 다시한번 이기적인 부탁을 남깁니다. 좋은 음식을 드시고 매일 운동하면서 내 옆에 오래 오래 계셔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