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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Jan 05. 2023

목소리를 기억하는 택배 기사님

이루어지지 못할 꿈, 여유로운 도시를 꿈꾸며

택배를 거의 매일 받는다.

회사에서 막간을 이용해 장을 보고, 급한 물건은 새벽배송으로 받는다. 백화점 물건도 웬만하면 택배를 이용하니 온라인으로 거의 모든 쇼핑을 하는 셈이다.

그래서 다양한 업체의 기사님들이 우리 집 앞을 다녀가신다.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C 업체, L업체 기사님들의 성함이 익숙하다.

그중 목소리마저 익숙한 분이 바로 우체국 택배 기사님이다. 늘 집 앞에 물건을 두고 가시는 다른 기사님들과는 달리 우체국 택배 기사님은 확인전화를 주신다.
간혹 등기 때문에 전화를 주실 때는 더 길게 통화를 하기도 해서 목소리도 낯이 익다.

어제 우체국 택배 기사님이 전화를 주셨다.

"ooo 씨?"
"네~"
"우체국인데요. 아유, 목소리가 안 좋으시네요. 어디 아프세요?"
"아니에요. 사무실이라 작게 받아서 그래요."
"아, 예, 택배가 왔는데 원래 ooo 씨는 A빌라신데 B빌라로 물건이 왔네요. 주소 맞으세요?"
"아~ 하하. 네 저희 엄마 집이에요. 맞아요."
"아~ 그러시구나. 혹시 잘못 갈까 봐요."
"네,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말도 할걸, 사무실이라 급히 끊느라 인사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기사님이 내 목소리 상태도 기억하시는 것도 신기하고, 우리 집 주소가 아닌데 다른 집으로 배달이 갈까 봐 걱정이 돼서 전화 주신 것도 고마워서 웃음이 났다. 친근해서 얼굴이라도 한번 뵀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이분이 다른 택배기사님들에 비해 워낙 다정한 분이긴 한 것 같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택배기사들의 고용형태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분의 고용형태를 알 수는 없으나 등기까지 배달하시는 걸로 봐서는 집배원 역할을 병행하시는 분인 것 같다. 그래서 일반 택배 기사님들보다 시간적 여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계단을 다 올라오는 시간도 아끼기 위해 한 층 아래에서 택배 물건을 던져 올려야 하는 기사들을 보면서 저렇게 뛰어야 하는 것이 자신의 의지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동네 곳곳을 지나다니는 택배차량, 계단을 세 칸씩 뛰어 올라가는 택배기사들, 친절하게 전화를 주시는 우체국 택배 기사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시애틀 우체부 작가님이 생각났다.



'시애틀 우체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셔서 시애틀에서 우체부일을 하시는 한국 분이 우체부 생활, 미국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쓴 책이다.

시애틀 우체부로서 관할하는 동네의 많은 이웃들과 친하게 지내신다는 내용이 나온다. 오랜 시간 우체부일을 하면 주민들도 우체부를 가족처럼 챙겨주고, 우체부도 우편물을 받는 이웃들이 남처럼 여겨지지 않아 따뜻한 일들이 많이 생긴다고 한다.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셨다. 우리나라의 우체부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는 근무 시간과 환경의 차이도 있을 것이라고. 최소한 안녕하시냐, 요즘 건강은 어떠시냐 라는 말이라도 물을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반가운 인사를 나눌 마음의 여유도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가 한국에 와서 잠시 아르바이트로 영어수업을 해 주시는 선생님과 이민생활, 서울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서울이 살기에 가장 힘든 도시 중 하나라고, 가장 바쁘고 가장 여유가 없는 곳 중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밤낮없이 운영되어야 하는 많은 사회 시스템 속에서 편리하기도 하고 각박하기도 한 생활을 하고 있다. 아마도 누군가가 여유로워진다면 우리의 삶은 조금 더 불편해 질지도 모른다. 새벽 배송이 생기면서 저녁 늦게 주문한 책을 다음날 아침 일찍 받는 지금의 삶에 익숙해져 이런 것들이 사라진다면 리모컨이 없는 세상으로 돌아간 것만큼 불편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가능성이 없을지라도 여유로운 세상을 꿈꿔본다.

한 박자 늦게 걸어도 별일이 없고, 식사준비를 천천히 하고 오래오래 씹어먹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면 좋겠다.

나부터도 꼭 아침에 이어폰을 꽂고 출근준비를 해야 시간을 잘 쓰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니 남들에게 할 말은 없다.

그저 숨을 돌리고 헛발질을 좀 해도 그럭저럭 모두가 잘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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