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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Jan 13. 2023

직모로 태어난 것은...

ft. 곱슬머리의 비애

아침 일찍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 부슬부슬 온다.
춥지 않은 날씨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봄비처럼 반가웠다.

출근길이 좀 귀찮긴 하지만 비 오는 날이 좋다. 비 오는 풍경도, 거리도 좋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에는 싫어하기도 했었다.

바로 비 올 때마다 기승을 부리는 곱슬머리 때문.


어려서는 귀여웠다고 한다.
파마를 한 것도 아닌데 이마와 머리가 이어지는 부분에 잔머리가 동글동글 말렸다고 한다. 그건 양머리 묶어서 예쁜 어릴 때 얘기고.

그나마 머리를 길러서 땋고 묶을 수 있었던 초등학교 때는 몰랐다. 곱슬머리를 타고난 자의 괴로움을.


중학교에 올라가 단발로 머리를 자르고 보니 곱슬머리는 타고난 불행 중 하나였다.

단발머리가 뻗치지 않기란 곱슬머리에게는 불가능한 얘기였다. 스트레이트 파마 같은 것은 엄마가 해줄 생각도 안 했기 때문에 늘 물을 묻혀서 머리가 치지 않게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기를 쓰고 집어넣어 C컬을 만들어 봤자 찰리브라운에 나오는 루시처럼 머리 아랫단에 롤을 말아 놓은 듯 동그랗게 튀어나올 뿐, 찰랑이는 C컬 단발머리의 고고함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저 머리를 감고 말리기만 해도 착 달라붙는 생머리를 가진 행운아들이 약간 머리가 밖으로 뻗쳤다고 툴툴댈 때 복 겨운 소리를 하는 그들에게 위로를 해주지 않은 정도로 자존심을 세웠다.


매직 스트레이트라는 세기의 발명품이 생긴 후, 나도 직모를 가진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생머리의 시크함을 누리게 되었다.
그나마 한 달쯤 지나면 퍼머기가 풀려가기 때문에 온전히 생머리인척 하는 기간이 길지 못했지만.


이제 나이가 드니 염색도 하고, 적절히 파마도 해서 곱슬머리에 대한 불만이 크지는 않다. 그래도 직모로 태어난 것이 크나 큰 행운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내 입장에서 직모로 태어나는 것은 세상에 나와보니 부잣집 딸이더라 하는 상황만큼이나 천운 중 하나다.

학창 시절에는 툴툴 말리기만 해도 예쁘게 떨어지는 단발머리로 시간과 노력을 절약을 것이고, 성인이 되어서는 긴 머리 휘날리는 청순함도 일정기간 맛볼 수 있었을 것이다.


 수십 년간 스트레이트 파마로 소비 돈만 해도 수천만 원은 족히 된다. 특히 웨이브 파마를 하는데도 모근에서부터 웨이브가 시작되는 부분까지는 스트레이트를 해야 스타일이 살기 때문에 파마 비용도 두배로 드는 씁쓸함도 맛봐야 한다.

가끔 직모인들이 파마가 잘 나오지 않아서 불만이에요라고 하면 이성을 잃고 곱슬이 아닌 것에 감사하라고 진지하게 대답하여 없어 보이는 티를 물씬 낼 때도 있다.

오죽하면 조카가 두 돌쯤 되어 완전한 생머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평생을 곱슬로 고통받았던 나와 동생은 조카가 태어 낫을 때만큼이나 기뻐했을 정도다.


참고로 동생도 나 못지않은 곱슬머리로 어릴 적 머리숱까지 무지하게 많아서 혹독한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어느 날 중학생이었던 동생이 진지하게 이런 말을 했었다.

"언니, 곱슬머리는 우성이래. 그래서 곱슬이랑 생머리랑 결혼하면 곱슬 나오는 거야.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곱슬이 될 거야."

너무 실없으면서도 참신한 말이어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난다. 런 동생이 생머리 딸을 낳은 것을 보면 곱슬이  100 퍼센트 우성은 아니었구나.



오늘 아침, 출근 후 탕비실 창문으로 비 내리는 모습을 행복하게 바라보다가 자리로 돌아오는데 쭉 뻗은 직모를 내려뜨린 동료 직원을 보고 이런 생각들이 시작되었다.

그는 모르겠지? 직모로 태어난 자신을 이렇게도 부러워하는 동료가 옆에 앉아 있다는 것을? 무서울지 모르니 말은 해주지 않기로 했다.

루시는 곱슬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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