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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Dec 03. 2022

한 사람을 통째로 사랑하는 것

슈퍼소닉 내 남편

어제 퇴근길에 바나나를 먹고 껍질을 차에 그냥 두고 내렸다. 

아침에 출근할 때 버리려고 찾았지만 차 안에 바나나 껍질이 없었다. 

"어! 어제 내가 바바나를... "

"그거 내가 아침에 버렸어."

그새 남편이 치웠다고 했다. 

고맙기도 하고 그 재빠름이 우습기도 했다. 


남편은 정말 빠른 사람이다.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어서 일하는 모습도 많이 봤는데 빠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이런 성향 때문에 집안 일도 남편이 더 많이 한다.

그런 점이 고마울 때가 많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못마땅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쓰려고 꺼내놓은 물건들을 물어보지도 않고 순식간에 치워버리기도 하고, 장을 보고 와서 차근차근 정리해 넣어야 하는 것을 급한 성격 때문에 한 곳에 쑤셔 넣어서 사 온 것 자체를 잊어버리게 할 때도 있다. 

물론 내가 먼저 움직이면 될 일이지만 생각이 끝나야 행동하는 나는 남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유튜브가 활성화되기 전, 신혼 때의 일이다. 


집에서 요가를 해 보려고 요가 DVD를 주문했다. 그날 남편은 먼저 퇴근을 했고, 택배가 온 것을 보고 역시 잽싸게 케이스를 벗겨 내용물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내가 집에 돌아와 확인해 보니 배송된 것은 DVD가 아니라 비디오테이프였다. 배송오류가 있었던 것이다. 


업체에 문의해서 교환했어야 하지만 이미 바코드가 붙어있는 비닐 껍질까지 곱게 벗겨놓아서 교환을 받을 수가 없었다. 우리 집에는 비디오 플레이어도 없는데, 배송된 물품이 비디오테이프라면 속 포장 정도는 까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만 원쯤 손해 본 작은 일인데 그때는 어찌나 화가 나던지 한참 원망을 퍼부었었다. 


남편의 빠른 행동들은 가끔 나를 정신없게 만들기도 하고, 급하게 덜컥 저지르는 바람에 곤란한 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오늘 아침처럼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을 대신해주면 고마움이 가슴 깊이 샘솟는다. 


출근해서 사무실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참 염치없는 사람이다. 

남편의 장점은 쏙쏙 뽑아서 받아들이고 싶고 단점은 고치기를 바란다.

어찌 보면 이런 장, 단점은 모두 남편이라는 한 사람의 재빠르고 급한 성격 때문에 발현되는 현상이다. 성격이 급하고 행동이 빠르니까 집안일도 많이 하고, 내 일까지 대신해 주는 반면, 그래서 생각보다 행동이 앞설 때가 많아 실수도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잘하는 모습을 좋아하면 그 성향 때문에 생겨나는 실수는 당연한 일임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느리고 게으른 편이다. 

쓰레기도 모았다가 버리고 물건도 쓰고 나서 한참 있다가 제자리에 둔다. 

남편은 나의 이런 점을 한 번도 비난한 적이 없다. 가끔 내가 어질러 놓은 것을 치울 때 한숨을 쉬기는 하는데 그럴 때 그 한숨 조차도 나는 불편해할 때가 있다. 

이렇게 이기적일 수가 있나.

남편의 장점은 삼키고 단점은 뱉고 싶어 하면서 정작 나는 통째로 사랑받길 바라니 말이다. 

십여 년을 같이 살았지만 한결같이 부지런한 남편이 새삼스럽게 고맙다. 

나를 인정받고 싶으면 상대방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 참 간단한 원리인데 실천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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