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꿈꾸는 나와의 타협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한다.
우울이나 원망의 대상은 아니다.
15년을, 나의 30대를 고스란히 보낸 현재 나의 직장은 나쁜 기억보다는 즐거운 기억이 훨씬 더 많은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사를 생각할 때마다 어깨에 짊어진 짐을 모두 내려놓고 날아오르는 상상을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늘 그래 왔던 걸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았다. 한때 나는 이 회사에 뼈를 묻고 싶은 사람이었다.
"나는 짤릴 때까지 다닐 거야, 정년퇴임이 나의 꿈이야."
공공연히 외쳤는데, 왜 요즘 들어서 퇴사라는 단어를 입안에 사탕처럼 굴리며 달콤해하는 것일까.
물론, 직장이라는 곳은 원래 빈번히 탈출을 생각하게 하는 곳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가끔 들었던 허황된 생각이었고, 그 또한 월급의 달콤함, 동료와의 우애, 가끔 느끼는 성취감, 아직도 일을 하고 있다는 어느 정도 유치한 뿌듯함 같은 것들로 상쇄되어오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더 열심히, 퇴사를 꿈꾸는 정말 근본적인 이유는 뭘까.
아마도 그 이후의 삶에 대한 기대를 키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점점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진다. 하고 싶어 안달이 나서 힘들어도 신나게 해낼 수 있는 그런 일들로 매일매일을 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고작 40대 중반에 들어서는데, 여생을 좋은 것들로만 채워도 부족하다는 조급함이 생긴다.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지, 자식에게 늘 입버릇처럼 하는 잔소리를 나에게 해대면서도 자주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먹고살기 힘든 세상에서 따박따박 월급 받는 걸 감사한 줄 알아야지."
이성적인 내가 잔소리를 한다.
"알아. 지금 받는 월급 아니면 곤란해진다는 것을, 그만두고 나면 혹독한 찬바람을 맞고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나중에 여유가 생길 때 하겠다고 하고 싶은 것들을 너무 뒤로 미뤄버리는 것은 아닐까? 만족감을 느끼며 회사생활을 했던 30대는 이제 갔잖아. 40대와 50대는 '언젠가는'을 되뇌며 설레는 미래를 구체적이지도 않은 계획으로 묻어두면서 보내야 하는 거야?"
꿈꾸는 내가 반발한다.
"그럼 하고 싶은 게 뭐야? 그런 리스크를 모두 감수하고 진짜로 하고 싶다는 게 뭔데?"
"그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자신 있는 건 아니야..."
당당하게 주장하던 꿈 꾸는 나는 이제 시무룩해져 버린다.
오늘도 이성적인 나와 꿈꾸는 내가 토론에 토론을 거듭했다.
답을 내기 어려운 두 생각은 엎치락뒤치락한다.
결국 오늘 나의 선택은
'평탄한 이 길을 무작정 벗어날 수 없다.'이다.
'직장을 수단으로 삼아라'라는 조언을 어느 유튜브에서 보았다. 많은 위로가 되었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직장이 성취의 수단이었다. 나를 계발하고, 더 높이 올라서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도 하고 눈치도 보았다. 어느 정도는 남을 짓밟을 수밖에 없는 이 시스템에 이제는 익숙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거대한 물결처럼 판을 뒤집는 회사의 전반적인 변화들을 주기적으로 겪으며, 직장이라는 곳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곳인들 안 그렇겠냐만은)
그렇다고 직장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직장은 나와 내 가족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그 안에서 상사의 눈치를 보고, 동료와 합을 맞추며 조금이라도 더 버티려는 힘겨운 노력은 숭고하다.
좋아하는 일을 한편에 접어두고 일터로 나가는 나는 거룩하다.
버티면서 조화를 이루어 보기로 했다.
깨어있는 시간의 3분의 2를 회사에서 보낸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내어주고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월급을 받는다. 월급값을 하지 않는 것은 비열하다. 내가 무너질 만큼 소모되는 것은 막아야 하겠지만 책임을 다하는 것은 나의 자존심이다. 조직 안에서 월급값을 하며, 다른 조직원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만큼, 딱 그 정도가 기준이다. 기준은 누구에게나 다르지만 내가 세운 기준이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다면 그 정도로 족하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나를 키우기 위해 조금 더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다.
아침에 한 시간 더 일찍 일어나고, 점심시간은 살뜰히 아끼고, 저녁시간을 효율적으로 조절해서 시간을 번다.
40대 중반의 엄마와 10대의 아이는 꿈과 미래를 공유할 수 있다. 엄마의 미래에 대해 아이와 상의하여 나의 시간을 존중해 줄 것을 아이에게 요구할 수 있다. 성장을 원하는 엄마의 진지한 요구는 아이의 공감을 얻어낸다. 잘 안돼도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
아직 용기와 확신이 없는 상황이라면, 지금 이대로 할 수 있는 것을 해보기로 한다.
리스크를 감수하며 과감히 결단하는 용기 있는 자. 그것이 내가 아닌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도 에너지 소모이다. 이만큼 하기로 결정하는 것, 그 안에서 정성껏 내 시간을 쪼개는 것이 나라면 그대로 존중해주자.
조금 더 부지런히 나를 늘려나가던 내가 어느 날,
"이제 됐다. 다음 단계로 나가보자."라고 손을 내밀면 언제든지 그 손을 잡고 다른 세계로 나갈 수 있다.
그때까지 시간을 모으고,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분배하면서, 생활의 수단을 제공하는 직장에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고 하루하루를 일궈보기로 한다.
마음이 조금 가볍고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