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매거진
사막을 건너는 트레일러처럼
17. 괜찮아, 침착하게, 불평은 안 해도 돼.
아빠의 침착함은 어디서 왔을까?
by
춘춘
Oct 22. 2023
어릴 적에 우리가 살던 빌라에 불이 난 적이 있
었습니다.
한 집에서 부부싸움 끝에 남편이 불을 질러버
렸어요.
불이 건물 전체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아래층에서 발생한 불 때문에 건물 내부에 연기가 가득
찼습니다.
한 밤중에 아빠가 조용히 나와 동생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얘들아, 일어나 봐.”
"왜?"
"일어나서 나가야 돼. 밖에 불이 났어.
아빠가 하도 침착하게 말해서 많이 놀라지도 않
았어요.
불이 났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아빠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
습
니다.
대문을 여는 순간, 눈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연기가
자욱했
습
니다.
숨을 쉬어보려고 했지만 매캐한 연기가 먼저 숨구멍을 타고 들어와 공기를 마시려고 해도 꽉 막힌 듯 빨아들여지지 않았
습니.
우리 집은 1층이어서 그대로 숨을 참고 재빨리
밖으로
뛰어 나갔
어요
소방차가 빨리 온 덕분에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고, 불이 처음 발생한 집과 그 근처 복도까지만 불이 번졌
습니다
나중에 엄마가 동네 아줌마들과 얘기하는 것을 들었
어요.
자신도 쉽게 당황하는 편은 아닌데 애들 아빠가 보통 침착한 게 아니라고, 좀처럼 안 하던 남편 자랑을 하고 있더라고요.
대학에 가서 아빠가 운전을 가르쳐줄 때 아빠의 성격이 얼마나 침착한 지 다시 한번 알게 되었
습니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가르치는 사람 미치고 팔짝 뛰게 할 만큼 둔한 운전 연수생이
었어요.
그런 나에게 아빠는
한 번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교차로에서 빨간 불
이 들어왔는데도 멈출 생각을 안 하고 슬금슬글 움직이고 있었을 때, 어이없는 표정으로 "참...... 나" 라며 눈을 흘기던 그때가 가장 화 난 모습이었어요.
아빠가 이성을 잃고 화를 내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것
같습니다. 그저 원래 아빠는 대답도 늦게 하고 느긋한 성격이라 그런가 보다 했는데 조금 커서 생각해 보니 신기하더라고요.
평생 거친일을 하면서 타고 난 침착함이 줄어들 만도 한데 말
입니다.
아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
습니다.
열사의 땅에서 힘들게 보낸 나날들
,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임기응변으로 버텼던 경험들, 길 위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
어쩌면 젊었던 아빠가 겪어온 많은 일들이 삶을 조금 더 초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이 되어준 것이 아닐까요.
젊은 아빠가 사막의 동물과 함께 있다.
keyword
아빠
인생
부모
13
댓글
댓글
0
작성된 댓글이 없습니다.
작가에게 첫 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댓글을 입력해보세요!
춘춘
가족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회사원
박기사님 그때 사막은 어땠나요
저자
생활 에세이스트& 20년차 생물학 연구원 매일 매일 사는 이야기와 생각을 쓰고 있습니다.
팔로워
222
제안하기
팔로우
매거진의 이전글
16. 부모의 하루는 자식의 미래가 된다, 부지런한 삶
18. 반쪽짜리 롯데리아 햄버거와 교보문고
매거진의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