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괜찮아, 침착하게, 불평은 안 해도 돼.

아빠의 침착함은 어디서 왔을까?

by 춘춘

어릴 적에 우리가 살던 빌라에 불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한 집에서 부부싸움 끝에 남편이 불을 질러버렸어요.

불이 건물 전체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아래층에서 발생한 불 때문에 건물 내부에 연기가 가득 찼습니다.


한 밤중에 아빠가 조용히 나와 동생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얘들아, 일어나 봐.”

"왜?"

"일어나서 나가야 돼. 밖에 불이 났어.


아빠가 하도 침착하게 말해서 많이 놀라지도 않았어요.

불이 났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아빠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니다.


대문을 여는 순간, 눈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연기가 자욱했니다. 숨을 쉬어보려고 했지만 매캐한 연기가 먼저 숨구멍을 타고 들어와 공기를 마시려고 해도 꽉 막힌 듯 빨아들여지지 않았습니. 우리 집은 1층이어서 그대로 숨을 참고 재빨리 밖으로 뛰어 나갔어요

소방차가 빨리 온 덕분에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고, 불이 처음 발생한 집과 그 근처 복도까지만 불이 번졌습니다


나중에 엄마가 동네 아줌마들과 얘기하는 것을 들었어요.

자신도 쉽게 당황하는 편은 아닌데 애들 아빠가 보통 침착한 게 아니라고, 좀처럼 안 하던 남편 자랑을 하고 있더라고요.





대학에 가서 아빠가 운전을 가르쳐줄 때 아빠의 성격이 얼마나 침착한 지 다시 한번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가르치는 사람 미치고 팔짝 뛰게 할 만큼 둔한 운전 연수생이었어요. 그런 나에게 아빠는 한 번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교차로에서 빨간 불이 들어왔는데도 멈출 생각을 안 하고 슬금슬글 움직이고 있었을 때, 어이없는 표정으로 "참...... 나" 라며 눈을 흘기던 그때가 가장 화 난 모습이었어요.




아빠가 이성을 잃고 화를 내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것 같습니다. 그저 원래 아빠는 대답도 늦게 하고 느긋한 성격이라 그런가 보다 했는데 조금 커서 생각해 보니 신기하더라고요. 평생 거친일을 하면서 타고 난 침착함이 줄어들 만도 한데 말입니다.



아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열사의 땅에서 힘들게 보낸 나날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임기응변으로 버텼던 경험들, 길 위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

어쩌면 젊었던 아빠가 겪어온 많은 일들이 삶을 조금 더 초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이 되어준 것이 아닐까요.


젊은 아빠가 사막의 동물과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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