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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Jul 09. 2024

천계영의 DVD, 그리고 천재작가 천계영 화이팅

만화카페에서 20년 전으로...

천계영의 오디션을 읽을 때 입속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천재야 천재, 이 사람 천재'


그땐 모르고 지나갔던 만화 DVD를 오늘 읽으면서 또 몇 번을 중얼거렸다.

'진짜 천재다 천재.'


천계영은 만화잡지 윙크에 언플러그드 보이를 발표하면서 데뷔작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 뒤 엄청난 작품 오디션을 발표하고 스타 만화가가 되었다.

당시 나는 중고등 학교 시절 미친 듯이 빠져있던 이미라와 황미나 등의 순정만화에서 헤어 나와 대학생이 되어 있던 때였다. 다른 흥미로운 것들을 하느라 만화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었고, 그래서 천계영의 전성기 만화를 동 시기에 즐기지는 못했다.


20대 중반쯤에 친구를 잘못 사귀어(?) 한동안 만화카페에서 라면깨나 먹었는데 이때 천계영의 '오디션'을 보게 되었다.

기존의 순정만화와는 색깔이 완전히 다른 그림체와 독특한 소재 덕분에 트렌디한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매력을 느꼈었다.  



그리고 오늘, 중학생이 된 아들의 제안으로 만화카페에 다시 발을 들였다.

나는 지금 웬만한 카페못지않은 인테리어에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는 만화카페의 구석 골방에 앉아있다. 아들과 남편은 사다리가 설치된 2층에 올라갔고, 나는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와야 하는 1층 골방에 자리를 잡았다.


만화방에서는 다 읽은 책도 빨리빨리 바꿔와야 하고, 화장실도 가야 하고, 군것질 거리도 가와야 해서 2층 사다리를 여러 번 타고 다니기엔 이제 무르팍이 아프다.

옛날 같았으면 올라가기 재밌는 사다리 방에 갔을 텐데 세월이 야속하다.



서가를 돌아보다가 천계영의 DVD를 찾았다.

이건 전에 안 읽었던 거다. 8권밖에 안 돼서 하루에 다 읽기에 부담도 없다.


DVD는 환상을 보는 소녀 땀이와, 레벨 10으로 잘생긴 남자 비누, 독특하고 인기 없는 DJ 디디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만화에서는 브래드피트도 레벨 9다)


드라마로 만들어도 넷플릭스 우위를 선점할 만큼 스토리가 탄탄하다. 더 훌륭한 건, 중간중간 나오는 짧은 이야기들이다.


주인공 비누는 빈둥빈둥 놀고먹는 것 같지만 스토리 텔링을 해서 그 수익으로 먹고 산다. 스토리를 지어내어 영화나 책을 만드는 사람에게 아이디어를 파는 것인데 그 이야기 하나하나가 어이없고 기발하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혼자 골방에 앉아 낄낄대고 웃었다. 그러면서도 만화 속에서 두어 페이지만 차지하는 것이 아까웠다.

비누의 짧은 스토리들은 너무도 환상적이라 병맛과 SF의 중간쯤 될 것이다.



웃기면서도 가볍지 않고, 그러면서도 철학적이다. 마지막 완결 편 뒤에 작가 코멘터리까지 나온다.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 모티브가 되었던 것들, 에피소드의 숨은 의미, 소품들이 상징하는 것들 등을 읽다 보면 이런 한국 만화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진다. (그시절의 만화책에는 이런 낭만이 있기는 했다. 이은혜, 이미라, 황미나의 책 앞뒤 작가의 말은 거의 시 였다.)


작가 천계영에게는 독특한 이력이 있는데, 바로 이화여대 법학과를 졸업했다는 점이다. 공부도 재능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하는 것일 텐데, 거기다가 그림 실력과 예술적 감각, 상상력까지 풍부한 걸 보면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능력을 가진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꼭 타고난 것이라고만 하기엔 천계영 작가가 좀 억울하기도 하겠다.

예전부터 알던 만화가이지만 천계영을 더 좋아하게 된 이유는 오디션이 아니라 드레스코드 때문이었다.


종이 만화책보다 웹툰을 더 많이 보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종이책 작가들의 새 작품을 웹툰으로 보는 것은 드문 일이 되었었다. 젊은 웹툰작가들 작품 사이로 눈에 익은 작가의 작품이 올라와 반가웠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웬만한 패션 서적 저리 가라 할 만큼 정보가 풍부하면서도 재미가 있었다. 극적인 스토리가 없는데도 매편 지루할 틈 없이 흥미진진해서 작가도 작품도 아주 사랑하며 읽었었다.


작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대작 '좋아하면 울리는'을 만들어냈다.

천계영이 또 신작을 냈어? 의리상 봐야지.라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좋알람'은 누구도 생각지 못할 상상력과 세련된 러브스토리로 나 같은 X세대뿐 아니라 알파세대인 내 아들과 조카까지 홀딱 빠지게 만든 마력의 작품이었다.


만화 한 작품을 쓰면서 엄청난 정보를 모으고, 현대 감각에 맞는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매번 색다른 그림체와 제작 방식에 도전하는 작가의 노력은 읽는 내내 전율을 느끼게 한다. 타고난 재능에 노력까지 더해져 작품은 최고의 퀄리티를 자랑하고 작가는 존경의 대상이 된다.


천계영 작가가 몸이 많이 아프다는 뉴스를 보고 마음이 많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년이라는 세월을 들여 좋알람을 완성한 것을 보고 눈물 어린 박수를 보냈다.

간혹 연재 내용이나 분량에 대한 악플에 '지들이 뭘 알아?' 하며 진심으로 흥분도 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건 나보다 한 서른 살쯤 어린 독자들의 댓글이었음을 알긴 안다. 그래도 같은 독자니까 나는 악플러를 욕할 자격도 있다.


앞으로 천계영 작가가 신작을 더 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기대는 하고 있다. 무슨 작품이건 어떤 식으로든 재밌을 것이고, 작가가 천천히 오래오래 작업하며 건강을 지키길 바란다.


오랜만에 만화카페에 와서 노닥거리는 것이 매우 즐겁다.

저녁으로 세 식구가 라면도 한 그릇씩 먹었고, 좀 더 놀다 가야겠다.


다음은 아다치 미츠루를 읽어야지.

이 얼굴들 20년 만에 보는구나.



[2023년 어느 날의 주말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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