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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Nov 28. 2023

#3. 피아노 보내는 날

피아노를 처음 갖게 된 건 열한 살 때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삼촌이자, 조카 중에서 나를 가장 좋아하는 큰삼촌이 큰 마음을 먹고 사준 영창피아노다.

그 당시 영창을 살 것이냐 삼익을 살 것이냐는 피아노를 구입할 때 대단한 고민거리였다. 영창 피아노의 소리가 더 좋다는 피아노 원장님의 개인적인 의견에 따라 우리는 영창을 구입하기로 했다.


당시에 엄마는 너무 고가의 물건을 사는 것이라 잘 사고 싶은 마음에 피아노 학원 원장님께 도움을 청했고, 원장님은 친히 피아노 매장에 같이 가셔서 연주를 해보고 직접 골라주기까지 하셨다.


학교에 다녀와 보니 안방에 피아노가 있었다. 안방 한쪽을 다 차지한 피아노가 너무 예쁘고 듬직해서 그날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잠깐 피아노를 샀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가 안방에 들어갔을 때 눈앞에 훅 들어오는 중후한 갈색 피아노를 다시 보고 아, 맞다 나 어제 피아노 생겼지. 하며 또 한 번 가슴 두근거렸었다.


중학교 1학년때까지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엄마는 더 다녀도 된다고 했지만 왠지 중1은 피아노 학원 말고 영어, 수학 학원을 다녀야 할 것 같아서 그만뒀다. 영어, 수학 학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면서 다니고 싶은 피아노 학원을 그만둔 것은 올바른 판단이 아니었다.


학원을 그만둔 후 피아노를 열심히 치지는 않았지만 피아노는 내게 꼭 필요했다. 카세트테이프를 살 돈이 없던 중학생인 나는 정말 좋아하는 노래를 악보로 샀다. 주로 TV 드라마 삽입곡을 좋아했는데, 그건 마음먹고 최신가요 카세트를 산다고 해도 잘 포함되지 않는 곡들이었다. 문방구 앞에 꽂혀있던 '을지악보'판매대에는 내가 아는 모든 노래들이 다 있었다.

 

'걸어서 하늘까지'는 드라마는 열심히 보지도 않았으면서 노래가 좋아서 악보를 사서 연습하며 내 연주를 내 귀로 들었다. 맥가이버를 좋아해서 주제곡을 연습했고, 여명의 눈동자는 삽입곡들이 다 좋아서 몇 장을 샀다. 어떤 곡은 내가 연주할 수준이 못돼서 오른손으로 멜로디만 줄기차게 쳐댔다.


가장 열심히 연습했던 노래가 이상우의 '비창'이다. 비창은 드라마 결혼의 삽입곡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부유한 남자와 결혼한 유호정의 테마였는데 지금도 들으면 가슴이 서늘하다. 유호정은 너무 인상적인 등장인물이었다. 신혼여행 첫날밤 남편의 폭력성과 이중성을 알게 되고 처참한 마음으로 혼자 밤을 보낸다. 남편은 옆방에 묵겠다고 하며 방을 나가버렸다. 다음날 아침 방문을 열고 나와 옆방으로 들어가는 룸서비스 카트를 유심히 보는데, 그 방 안에서 웬 여자가 나와 카트를 받는다. 남편에 신혼여행에 내연녀를 데리고 와 옆방에서 묵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충격이란. 중학생이었던 나는 그 장면에서 놀란 유호정만큼이나 놀랐고 그 참신한 설정에 불륜드라마의 매력에 폭 빠졌다. 결국 당시 MBC에서 방영하던, 전국 모든 청소년이 다 봤다는 마지막승부를 보지 않고 SBS 결혼을 본 중학생이 되었다. 물론 엄마가 절대로 MBC로 채널을 돌리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후회는 없다.


그렇게 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피아노는 세월이 지나 동생네 집으로 이동을 했다. 부피가 너무 커서 집에 놓기 부담스러워했던 엄마가 피아노를 팔까 생각하는 걸보고 동생이 집으로 가져간 것이다. 딸이 있었던 동생은 나중에 딸이 그 피아노를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아들과 동생의 딸은 피아노 강습을 즐기지 못했고 십여 년 동안 피아노는 무용지물로 동생네 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번 겨울, 조카의 방을 정리하면서 동생은 피아노를 버리기로 결심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닌데 피아노가 우리 가족의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쓰렸다. 우리 집 이곳저곳을 자로 재면서 피아노를 우리 집으로 데려올 생각을 해 봤지만 도통 자리가 나질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 피아노를 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가져다 놓으면 아들이 흥미를 가질 수도 있겠지만 연립주택에 살면서 피아노를 치는 것도 이제는 민폐가 된다.


"내가 가져갈까? 못 버리겠어. 쟤를 어떻게 버려"

"언니, 요새는 집에서 저런 피아노 못 쳐. 나중에 준이가 친다고 해도 디지털 피아노 사서 이어폰 끼고 쳐야 돼. 가져가봤자 짐만 돼"

정리의 여왕 동생은 버릴 때는 정말 냉혹하다.

동생말이 정확히 맞는 말이라 받아들이기로하고 피아노가 가기 전날 가서 사진을 찍어왔다. 아무도 치지 않았던 피아노는 동생이 잘 닦아서 맨질맨질했다. 덮개를 열어보니 늘 덮어 두었는데도 건반 위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아직도 가지고 있던 악보들 중에 비창과 여명의 눈동자가 있었다. 이렇게 다 까먹을 수가 있나. 이제 멜로디 말고 두 손으로 치는 건 무리다. 세월이 흘러도 내가 피아노를 연습할 일은 없겠지.

결국 사진을 찍고 몇 번을 쓰다듬고 피아노를 보내주었다.


이제 이런 무거운 피아노는 재활용도 잘 되지 않는다고 한다. 전국에서 나오는 헌 피아노가 너무 많아서 대부분은 폐기된다고 한다. 어딘가에 기부를 하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원하는 곳이 별로 없다고 했다. 돈을 받기는커녕 처리비용을 주고 피아노를 폐기했다.

피아노를 보내는 날 미련 없던 동생도 아저씨들이 들고나가는 피아노를 보니 울컥했다고 한다.

덩치가 큰 물건들은 눈에 오래 들어와 있어서 헤어지기 더 아쉽다.


피아노를 보낸 지 한 달쯤 지났는데 가끔 생각이 난다. 십여 년 간 동생네 방에 처박혀 있을 때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으면서 뭘 이제 와서 그리운지 변덕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동안은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친구처럼 생각 안 해도 그냥 마음이 편했는데 이제는 그 친구가 세상에서 없어진 것처럼 허망하다.


얼마 전 드라마 '남남'을 봤다. 주인공 진희와 엄마가 살고 있는 집 한구석에 우리 피아노처럼 나무로 만든 묵직한 피아노가 놓여있다. 우리 것 보다 조금 더 세심한 조각이 들어간 예쁜 피아노였는데 그 피아노를 보니 우리 피아노 생각이 다시 났다.


아, 저렇게 인테리어용으로 어딘가에 세워두기라도 할걸, 무리해서 책장 하나를 빼더라도 자리를 마련해 볼걸. 엄마는 그때 크지도 않은 안방에 장농, 피아노, TV만 놓고도 살았는데 나는 너무 많을 것을 욕심내느라 피아노를 구하지 못했어.

어처구니 없는 자책까지 한다.


미련을 오래 남기는 것만큼 미련한 것도 없다. 없어져 버린 피아노가 파되지 않고 어딘가에서 다시 쓰이고 있기를 바란다.  오늘로 피아노에 대한 미련은 사진속에 남겨두고 마음에서 접어버리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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