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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Nov 27. 2023

#2. 집착

불편한 채로 괜찮을 줄 알아야 해. - 피비

볼펜심 갈아 끼우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자원보 차원이 아니라 일종 집.


볼펜심 안 나올 때까지 다 써버리고 리필 심을 끼울 때의 쾌감.

립밤을 끝까지 짜 쓰고 더 이상 눌러도 나오지 않아 가위로 중간을 잘라 파서 쓴 후 껍질만 날름 남았을 때 버리는 쾌감.

이런 것에 집착이 있다.


그것 말고 너무 사소해서 남들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운 집 꽤 있다.

가계부 잔액이 원단위까지 맞아떨어져야 속이 후련하다. 오차를 '잃어버린 돈'이라고 표기 해서라도 덧셈 뺄셈이 깔끔하게 맞는 장부를 만들어야 한다든가. 파워포인트 자료를 만들 때는 선과 선을 이은 부분을 딱 맞추려고 화면을 최대한 확대해서 빈 픽셀이 없는지 까지 확인해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행동이라든가.

 

웃기는 건 이런 '딱 맞춤'에만 집착할 뿐이지 맨날 뭘 흘리고 다거나 자료의 일부를 빼먹는 등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는 느슨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가계부상 어디다 썼는지 모는 5만 원 정도의 적지 않은 구멍이 생기더라도 '잊은 돈 5만 원'이라고 입력해서 자릿수만 맞아 떨어지면 개운한 허당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앞뒤 안 맞는 집착 중 내면 깊숙이 나를 괴롭히는 심란한 집착은 '완전히 행복 충만한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다.

누군들 이런 상태를 싫어하겠냐만은 이게 잘 들여다보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큰 걱정거리가 없더라도 뭐가 됐마음을 깔짝거리는 거스러미가 하나도 없어야 충만 상태라고 안심하는 피곤한 생각 습관데, 인간의 시시콜콜한 삶 속에서 그런 시간을 오래 유지할 수는 없다.


이는 나의 오래된 숙적, 걱정병과도 닿아있다.

가만히 누워 잠을 청하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미지의 무가가 심장을 두드린다

'너 뭐 걱정거리 없어? 신경 써야 하는데 안 쓰고 있다가 놓칠만한 일 없는 거? 고민 좀 해야 되지 않겠어?'

만화에서 자주 보는, 귓가에 팔랑이는 조그만 악마처럼 머릿속에서 뭔가가 재잘거린다.

그러면 어리숙한 나는 하나씩 짚어간다.


'뭐지?

회사에서 해결 못한 일이 있나? 딱히 없는데.

돈 문제가 있던가? 아닌데.

아들한테 문제 있을까? 요즘 괜찮고.

부모님 건강검진 결과가 안 좋았나? 그 정도는 아니고.

남편이 내게 불만이 있을까? 아, 이건가. 아까 집에 올 때 내가 한 말에 좀 기분 상한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 저녁 먹을 때도  무표정했던 걸까? 내가 좀 피곤하게 구는 편일까? 우리 사이 괜찮을까? 나에 대한 미움이 생긴 건 아닐까?

아, 이것 때문에 마음이 불안정했던 거네.'


나는 이런 정상스럽지 못한 잡생각의 구렁텅이에서 매일 가상의 전투를 벌이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잘도 대인배인 척, 쿨한 척을 하고 산다.


그래서 연한 사람들이 롤 모델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내 남편이다. 그도 나 못지않게 예민하지만 대체로 자신이 속 편한 쪽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고민을 많이 하면 원형 탈모가 오기 때문에 일부러 털어버린다고는 하는데 그게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된다는 것 자체가 멘탈이 건강하다는 증거다.


그러고 보니, 그가 늘 별 일 아니라고 털어버리는 일들 중에는 내가 하는 불평도 함된다. 나는 그것이 불만이면서도 그걸 털어내는 그를 롤모델로 삼고 있다. 이렇게 모순일 수가 있나.


걱정 안 하는 머릿속을 꿈꾸는 나는 길모어걸스의 로렐라이가 되고 싶다. 결정적인 순간에도 감정적으로 판단하고 남들을 힘들게 하는 로렐라이에게 화가 나면서도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로렐라이가 부럽다. 결국은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면서 고개를 끄덕일만한 결말을 이끌어 내니까.


시트콤 프렌즈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레이첼의 이비 샤워 파티에 참석한 레이첼의 엄마는 파티를 주최한 모니카를 하루종일 무시한다. 니카가 레이첼 엄마에게 초대 연락을 늦게 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불편한 모니카는 끊임없이 사과를 하지만 레이첼의 엄마는 좀처럼 화를 풀지 않고 계속 빈정대기만 한다.

어쩔 줄 모르는 모니카에게 피비가 조언을 한다.

"는 사람들이 너에게 화 나 있는 걸 못 참아하지. 하지만 두 번이나 사과했잖아. 더 이상 안되잖아. 그럼 그런 상태에서도 괜찮을 줄 알아야 해."

피비의 이 조언은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피비는 늘 엉뚱하지만 자기만의 신조가 있다. 본인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손해는 보더라도 굽히지 않고,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부분은 이상한 논리로라도 판단을 마치고 내버려 둔다.


멍하니 시트콤을 보면서도 이런 생각에 도달하는 걸 보면 그 순간에도 내 머리는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거다.


가끔은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것까지 집착이 된다.

볼펜심은 심히 리필을 바꿔 쓰고, 문서의 줄은 딱딱 맞추고 살아도 괜찮다. 그건 좋은 축에 속하는 일이니까.


그리고 마음이 불편한 일들은 생명이 붙어있는 한 늘 안고 가야 한다는, 다 아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받아들인다. 

불편한 채로 괜찮을 줄 알아야 한다는 피비의 충고를 되새기면서. 괴짜라는 소리를 들어도 행복한 피비처럼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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