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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Dec 03. 2023

#8. 내비게이션 난독증

오늘은 피할 수 없었다.

운전면허는 취득한 지 25년, 본격적으로 운전을 한 지 십여 년이 넘었지만 매일 가던 길이 아니면 잘 못 간다. 출퇴근, 마트 정도 말고는 거의 가본 일이 없고, 초행길이면 운전면허 도로주행 전날처럼 시뮬레이션을 한다.

(참고로 서울을 가로질러 관악구에서 한양대학교까지 다녀왔던 날은 한강 고수부지에 들어갔다가 주차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온 적도 있다. 왜 그랬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간다. 오른쪽 도로로 가라고 해서 갔을 뿐이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꼭 차를 몰고 혼자 가야하는 날이었다.

출발할 때는 분명히 직선 고속도로만 가면 되는 난이도 최하 코스였는데 조금 가다 보니 내비가 자기 맘대로 노선을 바꿨다. 시키지도 않는데 막히지 않는 국도 길을 안내해 줬다. 아니지, 내가 어딘가 설정을 그렇게 넣었겠지. 아무튼 가다 보니 차선도 여러 번 바꿔야 했고, 고가와 지하차도도 지나야 하했다. 더구나 가장 싫어하는 네잎클로버 무늬의 꼬불한 길도 통과해야 했다.



바로 이런 길 말이다.

이미 시내를 통과하는 길로 너무 많이 들어와 버려서 체념을 하고 내비가 가라는 대로 가기로 했다. 그래 이 길은 최소한 빨리 달릴 필요는 없겠지.


역시나 시내로 가는 길은 돌발 상황이 많다. 도로변에 뜬금없이 세워진 불법 주차 때문에 우회전을 준비하려고 미리부터 정성껏 바꿔 탄 4차선 길에서 다시 3차선으로 들어갔다가 나와야 한다. 이게 무슨 큰 일이냐고 하겠지만 운전 모지리에게는 크게 돌발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이런 것들은 그럭저럭 해결이 된다. 나를 가장 괴롭히는 건 내비게이션 안내가 알쏭달쏭할 때다.


오늘 첫 번째 삽질은 잘못된 우회전.

내비게이션에서 500미터를 가서 우회전하라는 말이 제일 어렵다. 특히 골목이 여러 개라서 분명히 이 우회전인 줄 알고 돌았는데 네비가 경로를 재 탐색한다고 새침한 말투로 안내를 하면 울화가 터진다.


오늘은 그런 길이 아니었는데도 미리우회전을 해 버렸다. 스마트폰 화면이 두 개로 나뉘어 왼쪽은 도로 전반을 보여줬다. 500미터 더 가서 우회전을 하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왼쪽 화면은 500미터를 간 후에 도로 바닥에 그려진 도저히 안 보일 수 없는 파랗고 굵은 선을 따라서 우회전하라고 자세이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건 너무 쉽다고 생각하며 놓치지 않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아직 500미터를 가지도 않았는데 가볍게 우회전을 했다. 이런 이상한 짓은 왜 하는 걸까?


그래서 또 경로를 재 탐색당했다.

우회전에 우회전을 거듭해서 다시 제대로 된 경로로 들어왔다. 다행히 3분밖에 더 늘어나지 않았다.


조금 더 가다가 드디어 마의 클로버 길이 나왔다.

이 길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우회전과 동시에 빙그르 길 따라 돌아서 큰길로 합류만 하면 된다.

자연스럽게 마지막 차선에 붙어서 우회전을 했다. 기분 좋게, 도로에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동그란 클로버 한쪽 이파리를 따라 돌고 큰길로 나와 옆 큰 도로 합류하려는데 바로 뒤에 오토바이가 붙었다. 가까지 붙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토바이는 사이드 미러로 볼 때 늘 너무도 가까워 보인다. 오토바이가 먼저 가주면 좋겠는데 친절한 기사님은 속도를 낮춰 내가 먼저 가기를 기다려주신다. 근데 너무 가까워 보여서 깜빡이만 켜고 못 들어가고 있었다. 결국 나는 큰 도로로 합류하지 못하고 다시 동그란 클로버 궤도에 다시 들어가고 말았다.


내비는 친절하게 다시 경로를 바꿔 줬다. 가끔 내비의 친절함이 나를 한심스럽게 생각하며 놀리는 게 아닐까 하는 피해의식이 든다. 물론 아니겠지.

결국 네잎클로버 이파리 네 개를 거의 다 따라 돌고 다시 아까 그 큰길로 합류했다.

다행히 시간은 5분 정도밖에 늘어나지 않았다.


남편이 그랬다. 운전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잘못된 길을 들어섰으면 그냥 그 길로 가서 다시 안내를 따라가면 되는 거라고. 문제는 잘못 들어가 놓고 무리하게 다시 차선을 바꿀 때 생기는 거라고.

나는 그 말을 아주 철저하게 잘 들으며 늘 잘못된 길을 편안한 마음으로 간다.

경로를 재 탐색해 주는 내비게이션을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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