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넘긴 책장들
'이번 책들 중에는 꽂히는 게 있으려나.'
아들의 취향을 찾기 위한 책구매가 오늘도 이어진다. 예스24 플래티넘 회원을 꾸준히 유지하는데 지대한 도움이 된다. 청소년이 좋아하는 책, 청소년 추천 도서, 젊은 작가의 책 이런 주제들 중에는 없었다. 그나마 가장 성공했던 책은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였다.
'엄마도 읽어봐, 이거 진짜 재밌어.'
어찌나 기뻤던지 손원평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사 주었다. 실패였다. 유사한 책들로 연결고리를 만드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제 싫어하는 종류는 대충 파악했다.
나랑 비슷한 성향이 있으니 내가 좋아했던 책들을 좀 좋아하려나. 호기심이 일었다. 오래전, 늦은 밤까지 덮지 못했던 책들을 찾아보았다. 엄마가 젊은 시절 푹 빠졌던 것들이라고 하면 좀 정겹게 느껴지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본다. 아이로봇이 재밌다고 하는데 끝까지 그 재미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독서 편식이 극단적이었던 나는 어린 시절에 소설만 좋아했다. 작가가 공들여 꾸며낸 이야기가 재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필집을 적지 않게 읽었던 이유는 아빠 때문이었다.
가까운 곳에 도서관이 없던 서울 변두리 우리 동네에서 책을 구입하지 않고 읽을 수 있던 방법은 도서 대여점뿐이었다. 나도, 아빠도 열린글방 단골 회원이었다. 소설보다는 에세이와 실용서를 즐겨 읽던 아빠는 가끔 자신이 읽고 난 책을 나에게 넘겨주곤 했다.
'이거 한번 봐 바라. 볼만하더라.'
책에 대한 긴 설명은 붙이지 않았다.
아빠가 건네주시던 책들은 건강 서적, 유명한 사람들이 쓴 자서전, 성공한 여성들의 에세이 등이 대부분이었다. 가끔은 읽기 싫어서 대충 훑어만 보기도 했고, 받아만 두고 손대지 않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빠는 두 번 말하지 않고 그냥 슬그머니 가져갔다. ‘반납한다’ 한마디 할 뿐이었다. 어떤 날은 ‘아냐, 읽을 거야. 연장해 줘요.’하며 가져가려던 책을 도로 낚아 채기도 했다. 내가 흥미 없어하는 책을 회수해 가는 아빠의 모습이 그때는 좀 쓸쓸해 보였던 것 같다.
아빠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억지로 붙잡고 읽었던 시간이 누적될수록 지루한 책을 읽는 근육도 늘어갔다. 살면서 가장 처음, 많은 영향을 받았던 조안리 여사의 수필집 '사랑과 성공은 기다리지 않는다'는 아빠가 동네 대여점에서 빌려다 준 것이었다. 선택권이 내게 있었다면 놓쳤을 책이다.
아들은 만화책을 좋아한다. 만화책은 읽으라고 하지 않아도 매일 밤 배를 깔고 엎드려 한참씩 읽으면서 글씨책은 하루에 열 쪽만 읽자고 해도 다 못 읽는다. 같이 책 읽자고 앉아 있으면 두어 페이지 읽고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뜬금없는 얘기로 수다를 시작한다.
'아이로봇 수십 년 전에 쓴 거래. 와, 작가 진짜'
갑자기 폰을 들어 작가를 검색한다. 책이 아니라 작가 프로필을 읽는데 빠져든다. 다 읽고 검색하길 바라는 내 속에서 울화가 터진다.
'하루에 50페이지씩 책을 읽으면 대학 쉽게 갈 수 있다.'
피식 웃는 아들이 근거 없는 내 말에 넘어간 것 같지는 않다. 엄마가 읽으라고 하니 선심 쓰듯 읽어주는 아들에게 고마워하기로 애써 마음을 돌린다.
그렇게 까지 책 읽는 것이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다고 할 만큼 확신은 없다. 어쩌면 아들은 영원히 책에는 흥미를 붙이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랄 수도 있고, 책 따위는 읽지 않아도 좋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권하기의 힘을 믿는다.
한참 꼬리에 꼬리를 물며 검색하던 아들이 갑자기 일어나 책장 앞을 어슬렁 거린다.
'엄마, 난 우리나라 요괴 얘기가 좋거든. 요괴책 어디 없나 해서 검색했더니 엄마가 사놓은 두 권이 다더라.'
어이없다는 듯 내가 사둔 요괴책을 꺼내 들며 아들이 말했다. 나는 환호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