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2학년생이 심도 깊은 고민을 하는 동안, 학교 밖에서는 온 나라를 뒤흔드는 IMF 금융위기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심각한 것인 줄도 몰랐다.
경제가 어렵다는 소리야 늘 듣는 얘기였고, 아빠의 벌이가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나는 어차피 아르바이트를 해서 내 용돈을 벌었으니 나에게 타격이 오지도 않았다.
밤낮으로 놀러 다니던 대학 생활의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현실적인 문제가 닥쳐왔다.
취업률이 급격히 떨어진 것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무렵만 해도
'교수님이 아시는 회사에 말씀 한번 해주시면 취직은 가능하고, 본인이 가고 싶은 회사를 가려면 학점과 영어점수 관리를 해야 한다'라는 조언을 들었는데 몇 년 사이에 상황이 급변한 것이다.
더구나 이공계 여성의 취업은 더욱 어려웠다. 공학을 전공한 여자 선배들이 뜬금없이 카드사의 계약직으로 급하게 취업하는 사례가 하나둘 늘어났다.
나는 공부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전공과 관련 없는 업계에 취업하기도 두려워 대학원 진학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학원 선배들의 진로도 그다지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실험시간에 우리를 가르치던 선배들도 졸업 후 대기업은커녕 병원이나 연구기관에 위촉 연구원으로 취업하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대학원을 가더라도 내가 다니는 학교보다 조금이라도 네임 벨류가 높은 곳으로 가야 한다는 부담이 생겼다.
마지막 학기에 다른 학교 대학원 입학을 위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일찍 준비하지 못해서 두 달 내에 점수를 많이 올려야 할 판이었다.
그 몇 주 동안 나는 대학 4년 내내 토익공부를 했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의 문제를 풀었다.
한 달간 단어를 외워봤자 얼마나 외워지겠는가. 단어와 문법은 포기하고 종일 듣기 문제를 풀었다. 문제 풀고 답 맞추고, 또다시 풀기를 반복했다. 주말에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기숙사에서 하루 종일 문제를 풀었다. 어차피 실력이 늘기는 힘드니 문제라도 익숙해 지자는 작전이었다.
그런데, 며칠간 쉬지 않고 문제를 풀다 보니 문제 유형이 익숙해지는 것과는 별도로 듣기가 조금 잘되는 것 같았다. 토익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문제를 풀고, 답을 맞히고 또 그 문장을 분석하고, 그렇게 몇 문제 풀다가, 지겨우면 책을 덮고 커피를 마시러 나가버리기가 일쑤였는데, 일생일대의 시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코앞에 와 있으니 중간에 쉬는 시간도 없이 몇 시간을 내리 영어를 듣는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듣다 보면 긴 문장도 간혹 명확하게 들리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즉, 그전에는 긴 문장이 정확히 들린 적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사실 토익시험에서도 몇 개의 단어를 끼워 맞춰 대강 찍으면 맞는 문제들이 많았기 때문에 점수를 딴 것이지 '그래. 이게 답이야.'라고 확신하고 쓴 것은 Part 1,2의 몇 문제 정도가 다였던 것이다.
그렇게 몇 주간 틈날 때마다 듣기 자료를 들으며 문제를 풀었고, 다행히 벼락치기가 성공하여 커트라인에 닿을락 말락 하는 수준으로 점수를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기적같이 딴 점수를 면접관이던 교수님에게 말했을 때, 교수님이 웃으며 건넨 "영어공부 좀 더 해야겠어요."라는 그 말. 그 말을 명심했어야 했다.
대학원에서 나의 유일한 걸림돌은 영어였다.
실험실 학생들이 모두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유난히 내가 있던 2년간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 중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캐나다에서 연수한 친구, 호주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온 선배, 영어로 수업을 한다는 특이한 대학을 나온 동기, 원래 본교 출신인 공부 천재...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평범하게 토익 675점을 받고 졸업한 나는 논문을 하나 읽을래도 며칠씩 걸리며 진을 빼야 했다.
사실 나는 공부를 좀 못해서 그렇지 꽤 성실했다.
새벽까지 해야 하는 실험도 지치지 않고 열심히 했고, 손도 예민하고 빠른 편이라 세심한 조작이 필요한 실험도 잘 해냈다. 눈치도 빠르고 사람들과 지내는 것도 편했다. 수업만 듣던 대학 때와는 달리 대학원의 실험실 생활은 적성에도 맞았다.
(그때 구글 번역기만 존재했더라도 나는 박사과정을 밟았을 것이다.)
그나마 논문과 원서는 사전을 찾아가며 따라갈만했다.
나를 가장 괴롭히던 것은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랩 세미나였다.
랩 세미나란 일주일에 두 명씩 논문을 읽고 발표하는 실험실의 주간 회의 같은 것이었다. 대학원 학생들의 영어 사용을 장려하던 담당 교수님은 랩 세미나를 영어로 진행하셨다.
논문을 읽어서 이해하고, 한두 장 정도로 간추리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것을 영어로 발표하고, 질문과 대답을 영어로 해야 하는 그 수업 시간이 죽을 맛이었다.
그럭저럭 넘어가던 랩 세미나에서 최악의 기억을 선사해준 단어 'Ratio'.
지금도 가끔 만나면 약 0.5초간 멈칫하게 되는 이 단어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Ratio, 비율"
정말 이 단어는 논문에 허구한 날 나오는 단어였다. 그래프상에 A파트의 비율은 어쩌고 저쩌고, 비율이 높아질수록 어쩌고.
내 차려가 된 발표시간에 나는 이 단어를 별생각 없이 '뤠티오'라고 발음했다. 그것도 몇 번이나.
그날 발표를 다 마치고 나서 교수님이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이 부분을 지적하셨다.
"그건 '뤠티오'가 아니라 '뤠시오'야.
그리고 말이지, 논문을 읽고 공부하려면 영어를 좀 해야 돼.
논문도 써야 하고, 앞으로도 필요하니까 영어공부는 열심히들 하라구."
20년이 다돼 가는 일이지만 그때 교수님의 말씀이 또렷이 기억난다. 크게 모욕적인 말씀도 아니었는데 나는 너무 부끄러워 몇 초간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날뻔한 것을 꾹 참았다.
한참 지나서 영어를 잘하는 동갑내기 실험실 친구에게 영어에 대한 고민을 내비쳤다.
"나 영어 못해서 너무 고민이야. 랩 세미나 할 때마다 미치겠어."
"다들 그렇지 뭐. 그냥 하는 거지. 너도 비슷해."
그것도 자존심이라고 전에 'Ratio'때문에 죽고 싶었다는 말은 차마 하기 싫어 돌려 말했다.
"나는 솔직히 교수님이 물어보시는 질문도 확실히 이해 안 갈 때가 많아."
"그럼 한 번 더 물어봐'I'm sorry?' 이렇게."
"근데 가끔 물어봐도 또 못 알아들을 때도 있어."
"그럼 I'm sorry. 해"
어이없는 친구의 처방에 낄낄대면서도 '다들 못하고 너도 비슷하다'는 친구의 말은 진심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 영어가 그렇게 엉망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아니, 내 영어는 분명히 엉망이었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의 영어도 엉망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영어를 잘하는 몇 명을 빼고는 더듬더듬 말했고 가끔은 말을 못이어서 몇 초간 정적이 흐를 때도 많았으니까.
그러나 실수란 것이 그렇지 않은가.
남들의 실수는 잘 못 느껴도, 내가 실수할 때에는 머리로 피가 쏠리면서 세상 모든 시선이 나에게 꽂히는 것 같은, 순간 내 숨소리만 들리는 그 느낌 말이다.
그런 실수는 생각할수록 눈덩이처럼 커져서 가슴을 짓누르고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휘저을 만큼 머릿속에 콕 박혀 가끔씩 나를 괴롭힌다.
2년간 매주 영어 랩 세미나를 했지만 나의 영어는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본격적인 영어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고, 늘 영어가 힘들었던 나는 논문을 쓸 때도 인터넷에서 비슷한 문장을 찾아 문법을 맞춰보기 바빴다.
즐거운 날들도, 함께 고생한 날들도 많았고, 지금은 그럭저럭 다들 비슷하게 살고 있는데도 가끔 그들을 만나면 묘하게 긴장할 때가 있다. 세월이 흘렀는데도, 주눅 들어 있던 예전의 내가 지금까지도 내 안에 남아있어, 냄새를 맡으면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듯 그때 그 순간들을 불러오는 것이 아닐까.
그런 기억들이 세월이 흐른 후에도 영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나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