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일 할 때 좋은 점 몇가지
12년.
이제는 내가 걸어온 길을 한번쯤 정리할 때도 되었다. 2006년 초에 인터넷쇼핑몰 창업을 한 뒤로 지금까지 쉼없이 달려왔다. 급격한 시장 변화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수많은 경쟁업체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동안 그래도 우리 회사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니 나름 잘 운영해 왔다고 자부하고 싶다.
물론 10년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회사를 고작 그 정도 규모로 밖에 키우지 못했냐고 반문하면 그 또한 맞는 말이다. 구차하더라도 변명을 하자면 나는 원래 그 정도로 탁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 스스로 진작에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성공한 기업가들의 자전소설을 읽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독려하며 열심히 노력하지만, 솔직히 세상 일이라는 게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 아닌가. 12년 동안 단 한번이라도 직원들 급여 밀리지 않고, 고객들에게 그다지 욕 먹지 않고, 거래처에 좋은 평판 듣고, 경쟁력 있는 신제품 개발하고, 해가 지날 때마다 더욱 좋아지는 회사 만들려고 애 쓰는 것만 하더라도 내 능력으로는 벅찬 게 솔직한 심정이다.
내가 보유하고 있는 평균 수준의 지적 능력과 적당한 열정과 흙수저 배경에 알맞는 인간관계라는 자산으로 무한에 가까운 레드오션을 헤쳐나가기 위한 한가지 방법은 주 6일 근무다. 그래도 형편이 많이 좋아졌다. 한 때는 주 7일 근무에 매일 야근이었으나 이제는 일주일에 하루쯤은 휴식도 취하고 야근도 많이 줄였으니, 요즘 유행하는 트렌드인 '워라밸'(워크와 라이프의 밸런스를 맞추는 스타일이라나)을 지향하고 있는 셈이다.
회사에서 5일을 근무한 후 마지막 휴일 근무는 토요일이 되기도 하고 일요일이 되기도 한다. 일요일보다는 토요일이 잦다. 근무지는 대체로 도서관. 예전에는 토즈처럼 집 근처 스터디룸을 주로 이용했지만 지금은 서초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타이핑 치기 귀찮으니 이하 도서관으로 줄임)이 메인 오피스다. 주말 패턴은 거의 둘 중 하나다. 금요일 술자리를 가지고 일요일 늦게 일어나 수영복을 챙겨서 수영을 한 뒤 바로 도서관으로 향한다. 이럴 경우 밤 10시 정도까지 도서관에서 야근. 금요일에 불가능에 가까운 절제력으로 금주를 하면 토요일 일찍 일어나서 10시 전에 출근해서 오후 6시 경까지 근무.
휴일 특근 하기에 도서관이 좋은 점이 몇가지 있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급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사 책상에는 늘 전날 못 다 마친 급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인터넷쇼핑몰이라는 게 이만저만 일이 많은 게 아니다. 특히 우리처럼 기획, 디자인, 생산부터 최종 판매까지 전과정(이런 걸 대기업들은 수직계열화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던데)을 직접 다 할 경우 각 파트마다 구석구석 잡무들이 쌓여있다. 그 잡무들만 처리해도 하루가 금방 가 버린다. 그리고 그 일들은 끝이 없다. 기호로 표현하면 ∞다. 우리 제품과 서비스의 현 수준을 측정하고, 경쟁사와 시장동향을 분석하고, 경영 목표를 수정하고, 신사업을 구상하는 경영학 책에서 꼭 하라는 것들은 엄두도 못 낸다. 하지만 도서관에서는 가능하다. 노트북과 다이어리, 책 한권이면 충분하다. 급한 일이 아니라 중요한 일에 내 시간을 쏟게 만들어준다.
업무 분위기도 좋다. 회사 대표도 인간이다. 혼자 있으면 놀고 싶고 딴 짓 하고 싶다. 페이스북에는 재미나는 읽을 거리가 넘쳐나고, 보고 싶은 영화는 대부분 스트리밍 서비스도 하고 있고, 한때 즐겼던 게임도 유혹한다. 팝케이스도 듣고 싶고, 웹툰은 또 얼마나 재미있는가. 싵날보다 가는 그 절제력이라는 끈이 톡 끊어지는 순간 정신 차려보면 든든한 적금통장 같았던 나의 휴일 8시간이 보이스피싱을 당한 것처럼 깜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주말에 도서관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지금 잠깐 눈길을 돌려서 8인용 우리 테이블을 살펴보니 왼쪽 여학생은 메가스*디 사이트를 켜놓고 공부를 하고 있다. 그 반대편에서는 프린트물을 잔뜩 쌓아놓고 뭔가를 열심히 타이핑을 치고 있다. 논문을 쓰는 듯 싶다. 내 바로 맞은 편 젊은 친구는 한국어 공부 만화 출력물을 보고 있는데,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인지 외국인에게 한국인을 가르치는 교사인지 잘 모르겠다. 그 옆자리에는 무슨 사이언스라는 과학책을 읽고 있다. 그 맞은 편은 사기본기와 초한지라는 고전을 쌓아두고 컴퓨터로 뭔가를 검색하고 있다. 그 옆자리에 풍체가 좋은 중년 남성은 노트에다가 빼곡히 필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그 맞은 편에서는 이어폰을 꽂고 인강을 듣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가지다. 몰입해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 역시 이 공간에서는 몰입도가 확 좋아진다.
도서관 주변 환경도 양호하다. 무엇보다 좋은 점이 밥 때 되면 4천원에 그럭저럭 괜찮은 식사를 할 수 있다. 주말에 집에서 밥 얻어 먹을려면 와이프에게 이만저만 눈치 보이는 게 아닌데 떳떳하고 당당하게 한끼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학교 급식처럼 식판을 들고 직접 반찬을 골라 먹는데 고기와 야채가 적절하게 나와서 만족스럽다. 출출할 때 라면이나 짜장면 같은 분식도 가능. 식사 후 북카페에서 늘 마시는 커피도 나름 향기롭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체인점 같은데, 10잔 마시면 1잔 무료 쿠폰을 줘서 지금까지 여러 잔 공짜 쿠폰을 사용했다. 가끔 따라오는 친구가 있을 경우 이 쿠폰으로 커피를 쏘면서 나의 위엄을 보여줄 수도 있다. 지금은 시베리아 날씨라서 힘들지만 가을까지는 식사 후 소화도 시킬 겸 근처 산책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도서관 입구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몽마르뜨 공원에는 운동기구도 있고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다. 큰 길 넘어 서리풀 공원은 나무가 많아서 여름에 가면 특히 시원하다.
도서관에서 일 할 때 단점도 있는데 몰입감이 워낙 좋다보니 한번 뭔가를 하기시작하면 시간 흐르는 줄 모르고 그 일에 빠져들게 된다는 점이다. 지난 주 사내 독서포럼 도서 리스트를 정리했는데, 3시간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결국 200여권의 책 중 최종적으로 20권의 도서를 확정하고 난 뒤 시계를 보니 7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브런치가 뭔지도 모르다가 브런치 작가로 활동 중이라는 지인을 어제 세명째 만나면서 나도 한번 도전해봐야겠다고 글을 시작했는데, 이 역시 30분만 테스트 글을 쓰려고 마음 먹었으나 여기 도서관의 놀라운 몰입감으로 2시간째 글을 쓰고 있으니. 원래 계획했던 2018년 경영계획서를 마무리하려면 오늘은 주말 특근에 야근까지 해야 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