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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흑백필름 Mar 22. 2022

‘비라벨’을 위한 시간 구매

빨간색 배경에 흰색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결제하기 버튼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한 10초쯤 흘렀을까,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단숨에  딸깍, 버튼을 클릭했다. 매주 각양각색의 쇼핑몰 앱에서 클릭하기 버튼을 습관처럼 눌렀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내가 구매하고자 하는 게 물건이 아니라 시간인 탓일 거다. 그리고 그 순간 툭, 머릿속에서 질긴 끈 하나가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끈의 이름이 성공인지, 집착인지, 열정인지, 인정인지, 체면인지는 4달 후면 알게 될 터이다.

6월 18일부터 7월 19일. 정확하게 30일 동안의 시간을 돈으로 샀다. 


엔데믹을 대비해 야심 차게 개발한 제품 중에 베스트 아이템이 나올 것이고 어떻게 하면 빠르고 정확하게 생산해 낼지 공급망 문제를 체크하고 있을 것이다. 혹은 판매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몇몇 부진 제품들은 소구점을 바꾸어가면서 새롭게 마케팅을 펼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라이브 커머스나 유튜브용 영상 콘텐츠 제작에 집중하고 있거나, 최근에 급성장하고 있는 숏폼을 어떻게 우리 브랜드에 접목할지 이런저런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을 수도 있다.  

혹시 퍼포먼스 마케팅에 빠져서 CPM이니 CTR이니, ROAS니 하는 3, 4자리 이니셜로 축약하는 영문 약자와 지표 속에서 해법을 찾아보려고 구글 스프레드시트 가득 담겨 있는 숫자들을 브이룩업과 피봇테이블을 써 가면서 가공하고 있을 수도 있다. FW 시즌 콘셉트를 색다르게 하기 위해 디자인팀과 하염없는 논의 중일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모든 게 원만하게 잘 돌아가고 있다면 기업의 사명이니, 비전이니, 문화니, 평가 시스템이니, 천공을 붕붕 떠다니는 모호한 개념들을 ‘우리의 필로소피’라고 설파하면서 명문화 작업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제하기 버튼을 클릭하고 N페이에 연결된 카카오 통장에서 돈이 인출되는 순간 이 모든 것들은 예측 가능했던 나의 미래에서 1달 동안 사라지게 되었다. 아내와의 약속이자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한 이 12 레벨 게임의 첫 라운드가 시작된 것이다. 남은 11번의 라운드를 통과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세계여행이라는 단어는 연예인 같다. 드라마나 영화, 유튜브를 통해 늘 접하기도 하고, 간혹 친구의 잘 아는 친구가 실제로 그 유명한 배우라거나 가수라는 얘기를 전해 듣는다. 그러다 보니 곁에 있는 듯 친근한 개념이지만 막상 나 자신에게는 전혀 해당하지 않는 막막함 같은 게 존재한다. 어릴 적만 하더라도 세계여행 한번 다녀오는 게 뭐가 어렵냐며 호기롭게 외치다가, 청년이 되면 현실의 호락호락하지 않음에 좀 당황해 잠시 꿈을 미루어둔다. 중년이 되어서는 은퇴 후 로망으로 툇간에 슬그머니 숨겨두었다가 퇴임 후에는 젊을 적에 여러 번 기회가 있었는데 번번이 세상일 때문에 놓쳤다며 그 꿈을 술자리 안줏감으로 삼는다. 그 세상일이라는 게 어쩌다 있는 특별한 게 아니고 매일 맞닥뜨리는 밥벌이나 육아, 건강이나 사람 관계 같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들이다.


나 역시 직장을 다닐 때는 당장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바로 떠나리라 마음먹었다가 창업을 하고 먹고 살만 하니 사업이 좀 더 안정적으로 자리 잡으면 다녀오는 것으로 수정했다. 애가 좀 더 크면 떠나리라 약속했다가, 매출 50억을 넘기고 회사가 안정되면, 아니 100억은 넘겨야 위험하지 않을 것 같아, 막 론칭한 신사업이 자리 잡은 후에, 나이 50이 넘으면 반드시 떠나자. 수많은 필터를 끊임없이 생성해 내서 어떻게 해서라도 떠나지 못하는 명분을 스스로 만들었다. 세계여행이라는 게 1년은 떠나야 그나마 겉핥기라도 할 텐데 그 1년이라는 시간을 빼는 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중소기업 사장에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코끼리는 한 번에 한입씩 먹어야 한다는, 좀 끔찍하지만 유명한 명언처럼 해답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 있었다. 12개월의 무거운 세계여행을 1달짜리 여행 12번으로 나누니 갑자기 현실 가능한 무게로 가벼워졌다. 


 ‘응, 그래. 기껏 1달이야. 해외에서 틈틈이 회사 일도 볼 건데 얼마든지 해 볼 만한 도전이잖아’. 


스스로가 의지박약인 걸 잘 알고 있기에 이 마음이 2, 3주가 지나면 사업의 비전, 직원에 대한 책임감, 경쟁사와의 비교 등 별의별 변명으로 결정 보류를 할 것이 뻔해서 마음먹은 김에 바로 항공권까지 예매를 했다. 


정원이 있는 런던의 교외 주택에서 1달간 살면서 평화롭게 강가도 거닐어 보고, 박물관도 다니고, 주말에는 교외로 드라이브를 떠나리라. 공원 벤치에 앉아 사람들의 일상도 구경하고 햇살 좋은 노천카페에서 책도 좀 읽어 보리라. 아내와 나이 듦에 관한 시답잖은 농담도 해 가면서 오후 시간을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리라. 


결제하기 팝업이 뜰 때 2가지 감정이 연달아 느껴졌는데, 하나는 떠나기 전까지 남은  3달간 더 열심히 회사 일에 집중해야겠다는 몰입감. 나머지 하나는 사업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결국 삶의 부분집합일터인데 흐트러진 저울추를 다시 맞춰야겠다는 균형감이었다. 워킹과 라이프의 밸런싱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이 시대에, 창업가 혹은 CEO에게는 이 당연한 진리가 막중한 책임감 또는 성취욕으로 인해 호사스러운 단어로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결제 완료 승인이 떨어지는 순간, 내 내면에서 비즈니스와 라이프의 밸런싱인  ‘비라벨’을 추구해보자며, 세상의 경쟁에서 한발 물러서는 여유가 싹텄다. 돈의 가치는 인플레이션과 더불어 감가상각이 되지만, 시간의 가치는 한정 자원인 희토류처럼 나날이 가치 상승이 일어나고 있으니, 지금 돈으로 미래의 시간을 산 것이 얼마나 싸게 잘 산 거냐면서 자기 합리화를 했다. 싸게 잘 산 쇼핑인지, 후회막심한 충동구매인지는 4개월 후 ‘#내돈내산’ 구매평을 통해 전할 수 있을 것이다.                                                                               


                                                                                                                                              22.02.27. h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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