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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흑백필름 Mar 22. 2022

봄은 숫자다

중소기업 사장에게 봄은 숫자다


체온이 영하로 떨어져 피가 얼까 봐 두려워하는 변온동물처럼, 패션업 종사자에게 12월 말부터 봄이 오기까지 비수기는 끔찍함 그 자체다. 보릿고개는 예나 지금이나 이맘때다. 이 시기는 겨울옷을 사기에는 늦고 봄옷을 사기에는 이르다. 사람들은 옷 사기를 보류한다. 한 명 한 명의 '보류'가 모여 나에게 재앙으로 다가온다. 땅속 깊이 파고 들어가 거목의 뿌리 곁에 자리 잡고 체온을  8ºC 쯤 떨어뜨린 후 긴긴 겨울이 끝날 때까지 세상일을 모두 잊고 겨울잠에 빠져들고 싶다. 스스로 혈관을 얼리고 심장을 정지시켜 추운 겨울을 넘기는 캐나다 숲개구리처럼 영하의 시간을 통째로 훔쳐 어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두고 싶다. 


매출은 온도의 거듭제곱이다. 평온 기온에는 매출도 평온하며 회사 내 모든 직원이 평화롭다. 나 역시 인자한 미소를 띠고 실수에 관대해진다. 이만하면 ‘좋은 대표’라며 자화자찬한다. 그러다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반짝 특수효과를 누린 후 곧바로 긴 비수기에 접어든다. 손익계산서상에 적자의 붉은 선혈이 낭자해진다. 직원들은 예민해지고 실적 발표 시간에 피비린내가 난다. 서로 괜한 트집을 잡고 험담하며, 사소한 실수에 화를 낸다. 해답 없는 공허한 회의로 시간을 죽인다. 불행한 우리들의 구원자는 오직 봄뿐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처럼 애타게 봄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온몸의 감각이 봄의 신호를 감지하기 위해 곤두세워진다. 대기 중에 미세한 균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으로 알아챈다. 힘 빠진 투수의 포크볼처럼 글로브로 빨려 드는 겨울의 구속이 떨어졌음을 노련한 타자는 누구보다 빠르게 눈치챈다.


봄비가 내리고 새싹이 돋는 우수, 개구리가 깨어나는 경칩, 낮이 길어지는 춘분 같은 시적인 이름의 절기를 달력에 짚어가며 찾지 않아도, 대기를 이루는 물질에 봄이 침투했음은 생사가 달린 우리 업종의 사람들이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휴대폰 날씨 앱에서 오늘의 날씨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던 ‘-’ 기호를 떼고 영상을 향해 쭈뼛 한두 번 머리를 내밀다 마침내  5ºC를 돌파한다. 기상학자들이 TV에 나와 9일간 이동평균선이 5ºC를 넘었다며 그래프와 함께 봄이 왔음을 공인하지 않더라도 유아동 패션업을 운영하는 중소기업 사장은 온몸으로 기온과 계절의 변화를 체감한다.


이 모든 것은 측정 가능하다. 아파트 단지 내 볼품없던 나무들이 팬톤 13-0550 컬러의 싹을 맺고, 옆 화단에서는 개나리가 RGB #f7e600 컬러의 꽃잎을 선보인다. 출근길에 3m/s의 남실바람이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하늘에서 박새가 40dB로 울어댄다. 상대습도 38%에 불과해 내 마음처럼 푸석푸석했던 대기에 지름 0.4mm의 봄비가 초속 1.6cm/s로 내리면 봄기운이 67%까지 촉촉해진다.  


봄의 숫자들은 산들바람을 타고 회사 내로 스며든다. 이제까지 우크라이나 난민 같았던 회사는 봄이 데리고 온 화려한 숫자들에 감동하며 다시 활기차게 돌아간다. 1200x630 사이즈로 배경색을 2가지로 만든 봄 시즌 광고 소재를 인스타그램에 돌려가며 AB테스트를 한다. CPM 10,000원 이하로 노출을 확보하기 위해 상세 타깃을 설정한다. 14일 기준 일평균 판매량과 가중치를 부여한 시즌 판매 예측량을 토대로 원부자재를 준비한다. 택배 출고 1박스당 평균 물류 인건비를 산출하며, 그곳에 간식비를 포함할지 말지를 놓고 토론한다. 기온과 매출의 상관계수가 1에 얼마나 가까운지 따져본다. 매출 추세선이 반등해 우상향을 그리고 SS 시즌 최대 매출은 얼마를 찍을지 기대 섞인 전망을 한다. 봄 햇살이 가득한 성수동 지식사업단지 13층 코너 창가 책상에 앉아 듀얼 모니터로 푸른색의 흑자 그래프를 흐뭇하게 바라본다. 


그제야 겨울에서 깨어난 항온동물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는 다시 36.5℃, 따뜻한 사람의 체온으로 되돌아온다. 아름다운 인생에 뭘 그렇게 아웅다웅 거리냐면서 다시 너그럽고 관대하고 인자한 척 군다. 판관비를 공제한 반기 초과이익의 10%를 360도 다면평가를 통해 인센티브로 차등 지급하겠다고 호언한다. 회사의 성과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시간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지 않냐면서 복지를 챙긴다. 말끝마다 꼬투리를 잡아가며 팀장들을 닦달했던 겨울의 기억은 까맣게 잊고 55%의 가식과 40%의 위선과 5%의 진정성을 담아서 봄처럼 따뜻하고 ‘사람 좋은’ 대표 행세를 다시 시작한다. 


겨우내 꽁꽁 얼어 있던 뇌사상태의 캐나다  숲개구리가 기적처럼 부활해 봄의 우물로 풍덩 뛰어든다.  

                                                                                                                      2022.03.15 h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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