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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흑백필름 Mar 22. 2022

밀린 일력을 찢으며,

2011년 6월 29일 밤이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집 소파에 누워 새로 산 아이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이런 저런 인기앱들을 구경하던 중 눈길을 끄는 앱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Day One. 일기장처럼 쓸 수 있는 다이어리앱이었습니다.


‘일기나 한번 다시 써볼까?’


학창시절 틈틈히 써 오던 일기는 결혼한 뒤로 비밀이 지켜질까 싶은 우려에 그만 두었습니다. 가끔씩 어지러운 머리 속 생각들을 일기장에  정리하고 싶은 욕심이 들 때도 있었고, 가슴 속 답답함과 먹먹함을 꺼집어 내 햇볕에 말리듯이 일기장에 펼쳐 놓고 싶을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 있을까 싶은 혼자만의 걱정에 선뜻 펜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무언가를 기록한다는 건 영구적인 증거자료가 생성되어 과거의 행동을 미래에 책임져야 할 수도 있는 무거움이 따르니까요.


하지만 잠금장치가 있는 모바일앱이라면 좀 다르지 않을까? 자기검열 없이 내 속 내밀한  이야기를 온전히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라이트 블루의 은은한 컬러에 순백의 띠지를 두르고 있는 세련된 그 유료 앱을 단번에 다운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오늘까지 10년째 매일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특별한 하루가 찾아왔을 때만 가끔 앱을 누르곤 했는데, 점차 앱을 여는 빈도가 잦아지고 어느새 매일 일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일기를 쓰지 않으면 뭔가 할 일을 다하지 않은 찜찜함이 찾아오는 완전 습관의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저에게 주어진 매일 매일이 특별한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다분히 의도적인 제 욕심으로 더 치열하게 일기장에 꾹꾹 저의 일상과 생각을 기록했는지도 모릅니다.


새해를 맞아서 우리 브랜드를 사랑하는 고객분들께 어떤 특별한 선물을 선사해 드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책의 문구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도록 ‘한줄 문장 일력’을 제작해서 1천분께 선물로 보내드렸습니다. 고객 분만 아니라 열정적으로 일하는 우리 직원들과 제가 아끼는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선물로 드렸습니다.


하루 하루 일력을 찢는 건 너무나도 쉽고 간단한, 아주 사소한 행동이지만 밀어닥치는 일과 관계 속에서 정신없이 바쁜 일상에 쫓겨서 허둥대다가 번뜩 정신을 차려보면 책상 위 일력은 과거의 어느 순간에 가만히 멈춰 있을 때가 일쑤입니다.


어찌보면 단 한장의 일력을 찢는 건 어마어마하게 위대한 행동인 지도 모릅니다. 일기 쓰기나 일력 찢기처럼 아주 작고 사소한 행동들이 모이고 모여 오늘날 인류의 위대함이 만들어진 건 두말할 나위없는 명백한 펙트이니까요.


벌써 서른한장의 일력을 찢고 새로운 2월이 시작 됩니다. 무리한 속도로 달리고 있어서 지칠 것 같으면 속도를 조금 줄여도 좋습니다. 조금 뒤처진다 싶으면 살짝 보폭을 키우면 될 것입니다. 밀려 있던 이틀치, 사흘치, 일주일치 일력을 한번에 찢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일력 찢기를 조금 미루긴 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찢어가면서 하루 하루를 잘 헤쳐 나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끔 밀린 일기를 몰아 쓸 때도 있고, 밀린 일력을 몰아 찢을 때도 있지만 어쨌든 살아있는 동안 우리에게는 매일 특별한 Day One이 선물로 주어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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