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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흑백필름 Mar 09. 2023

유출된 답안지 훔쳐보기

대학 시절 처음 접한 오픈북은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답안지를 볼 수 있게 해 주고 시험을 친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모호한 시험문제 속의 정답은 교재를 뒤져봐도 좀처럼 정답을 찾을 수 없었다. 철학책 수십 권을 던져주고 "어떤 인생을 살고 싶나요?"라고 문제를 제출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답안지를 보고도 정답을 맞히지 힘들 때가 있다. 하지만 동일 문제에 오픈북도 아니라면 이는 더욱 암울하다. 


온라인 비즈니스는 오픈북 테스트다. 답안지를 던져주고 정답을 맞히는 시험이다. 오프라인 매장에서는 고객이 원하는 답안지를 찾기 위해 매니저 간담회도 하고, 설문도 돌리고, 고객 면담도 하고, 심지어는 고객의 집까지 찾아가서 힌트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온라인은 심플하고 정확하다. 리뷰에 정답을 적어 놓는다. 이건 이래서 좋아요. 이건 이래서 별로예요. 익명의 장막 속에서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감탄하며 타인에게 추천을 하기도 하고, 비난하며 구매를 만류하기도 한다. 파워리뷰어는 특정 제품의 매출을 좌지우지한다. 고객 개개인의 기호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분명한 건 답안지는 이미 유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주말에 소파에 누워 우리 제품의 답안지를 훑어보다 보면 내가 잘 못 제출한 오답 때문에 온몸이 부끄러울 정도로 오그러들 때도 있고, 만점 답안이라는 평가에 환호성이 나올 때도 있다. 이렇게 쭉 읽다 보면 이커머스는 온라인 거리 곳곳에 온통 답안지들이 유출되어 있는데, 정작 수험생들은 다른 곳에서 정답을 찾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교수님은 교재 속에서 문제를 출제할 것이고 오픈북 시험이라고 공지했지만, 뭔가 좀 더 쉽고 빠르게 정답을 찾기 위해 족보를 좇아다니는 새내기이자 풋내기의 면모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답안지 내용이 불편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온 정성을 다해 답안지를 작성했지만, 신랄하게 쏟아지는 비평은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자괴감에 빠지게 한다. 자기 방어기제가 본능적으로 작동해 슬쩍 답안지를 등뒤로 치워 버리고 엉뚱한 답을 쓰곤 하는 것이다. 그리곤 왜 채점이 이 모양인지 한탄한다. 


인터넷 쇼핑몰로 물건을 잘 파는 정답을 알고 싶다면 리뷰를 읽는 게 '족보'다. 우리 제품도 좋고, 경쟁사의 제품도 좋다. 1번, 2번, 3번 하단의 번호를 클릭해 가면 읽어보자. 추천순, 최신순. 텍스트 후기, 포토후기, 한 달 사용후기 등. 리뷰 속에서 고객의 불편함도 찾아내고, 만족에 영향을 미치는 우선순위도 발견하고, 가끔은 번뜩이는 영감도 얻을 수 있다. 한 여인을 두고 연적과 겨루고 있다면, 그 여인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만큼 유리한 건 없을 것이다. 


리뷰는 답안지이자 고객의 일기장이다. 우리는 그것을 읽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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