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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흑백필름 Jun 01. 2023

대표의 공부

놀러 온 후배한테 옷 예쁘다고 그랬더니 옥션에서 샀다고 자랑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음날 PC방에 가서 옥션이 어떤 곳인지 좀 살펴보니까 제가 물건을 팔 수 있겠더라고요. 집안 전체가 워낙 경제적으로 쪼들릴 때라서 앞뒤 안 가리고 그날로 바로 창업을 시작했죠. 


지난 주말에 만난 대표님의 창업 계기다. 나 역시 이 분처럼 옥션을 통해 첫 창업을 했다. 요즘 언론에 떠들썩한 전세사기를 2004년도에 일찍 감치 당해서 경제적으로 극도로 피폐할 때다. 서점에서 부업거리를 찾으려고 기웃거리다가 '옥션 성공을 위한 10 계명'이라는 책을 읽고 첫 판매에 도전했다. 그리고 어찌어찌 지금까지 흘러왔다. 


주변 대표들을 만나보면 사업을 하게 된 계기는 크게 3가지 부류로 나뉘는 거 같다. 


1. 태어날 때부터 대표

2. 준비된 대표

3. 어쩌다 대표


중소·중견기업의 2세로 태어나 가업승계를 받은 1번 케이스나 어릴 적부터 꿈이 사업가라서 경영학을 전공한 후 차근차근 준비해서 창업에 나선 2번 케이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내가 만난 창업가의 대다수는 열악한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보려고 바둥거리다 보니 어느새 한 회사의 대표가 된 케이스가 많다. 유유상종이라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좋기야 두말할 나위 없이 1번이 최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정자와 난자였던 시절에는 포브스지에서 대한민국 자산순위 100위 같은 데이터를 통해 부모를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현명하지 못했다. 그땐 아직 뇌나 눈이나 키보드를 칠 수 있는 손 같은 게 생성되기 전, 그냥 올챙이 같은 거였으니 어쩔 수 없다. 


고배당 도박판인 부자 부모 뽑기에서 실패한 후 다음으로 할 수 있는 게 어릴 적부터 꿈꾸기를 통해 사업가의 길을 차근차근 밟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 의사, 가수, 변호사 등을 꿈꿔서 이를 이루는 것처럼. 하지만 다른 직군에 비하면 사업의 경우 준비된 성공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의사가 되려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의대반 학원을 다니는 마당에 사업가가 되려고 경영학반 학원을 다니지는 않지 않는가. 결국 주변에서 만나는 대다수 대표는 '살다 보니', '어찌하다 보니', '우여곡절 끝에', '달리 방법이 없어서' 등의 수식어와 함께 대표가 되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렇게 갓 아기를 낳아 부모가 된 초보 엄마 아빠처럼 정신 못 차리고 당황하고 허둥지둥해 가면서 대표가 되었다. 젖병이나 기저귀, 포대기 하나 없이 덜컹 아이를 맡게 된 꼴이다. 그리다 보니 창업 후 제일 먼저 하는 게 사업 관련된 학습이다. 육아 유튜브를 보고, 육아서를 읽고,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거는 초보맘처럼 제대로 사업을 해 보려고 열심히 뭔가를 배운다. 이때 우리가 배우는 방식은 아래 도표처럼 4가지 방식이 있다.   


우리가 배우는 4가지 방식



어쩌다 창업가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방식은 경험을 통한 것이다. 돈을 벌어보기도 하고, 잃어보기도 하고, 사람한테서 힘을 얻기도 하고, 배신을 당하기도 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경험을 통해서 배워나간다. '배우고 익힌다'는 학습(學習)이라는 단어에서 익힌다는 의미의 습(習)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좌충우돌해가면서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건 임팩트가 있어서 마인드에 큰 영향력을 미치며 오랫동안 지속된다. 다만 시간과 공간의 제약 때문에 학습의 속도가 아주 느리다는 단점이 있다. 이 학습 방법은 나의 인위적인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다만 남 탓을 하는 경우에는 효과가 감소되니 이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경험보다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이 사람한테 배우는 거다. 사업 좀 한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기업인 모임도 기웃거리면서 '사람'에게 배우기 시작한다. 멘토를 만나기도 하고, 컨설턴트와 계약하기도 하면서 어깨너머로 그들의 노하우를 배운다. 저녁 모임이 잦아지고 외부 활동이 늘어난다. 사람을 통해 배운 만큼 사업을 보는 시야도 넓어진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평생 친구가 되기도 한다. 다만 이 방식은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한테 배우려면 우선 그 사람과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데 이는 일정한 양의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학습 속도는 경험보다는 빠르지만 여전히 느린 편이다. 대신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특정 상황에서 그들의 행동과 조언이 떠오르는 등 오랫동안 효과가 지속된다.  


좀 더 빠르게 경영을 배우려는 욕심이 들 때 우리는 책을 읽는다. 재미로 가볍게 하는 독서나 필요한 지식을 찾기 위해 하는 발췌독 말고 숙독 말이다. 이 독서는 단순히 지식 습득에 그치는 게 아니라 현재 내 처지에 빗대어가면서 끊임없는 숙고와 함께 이루어진다. 그래서 은근히 시간이 걸린다. 책의 핵심 내용이 내재화되고 오랫동안 기억된다. 어떤 책은 평생 동안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가장 쉽게 학습하는 방법은 오프라인 강연이나 유튜브 등을 통해서 배우는 거다. 10분짜리 숏폼 영상을 통해서 알짜배기 지식을 배울 수도 있고, 1시간짜리 강연으로 강사의 노하우를 즉시 흡수할 수 있다. 빠르게 배울 수 있다는 장점과 함께 빨리 잊히고 현업에 잘 적용되지 않는 단점도 있다.  


어떤 방식의 학습이 나은 지는 각자의 학습 방법이나 처지에 따라 다를 것이다. 분명한 거 어쩌다 대표가 된 창업자들은 이 네 가지 중 하나 이상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배우며 성장해 나간다는 점이다. 이렇게 배우고 익히다 보면 다양한 모순과 혼돈 속에 빠지는데 가장 대표적인 게 성공 방정식이다. 


- 하나만 제대로 해도 성공

- 하나를 제대로 못해서 실패


모순적인 이 두 가지 경우는 의외로 자주 만난다. 첫 번째 공식의 앞에는 (다 못하더라도) 핵심 경쟁력 하나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두 번째는 (다 잘하더라도) 중요한 거 하나를 빠뜨리면 실패할 수 있다는 전제다. 즉 다 못해도 성공할 수 있고, 다 잘해도 실패할 수 있다는 자가당착에 빠진다. 그래서 창업자들은 '잘하는 걸 더 잘해야 할지', '못 하는 걸 빨리 보완해야 할지' 늘 고민이다. 우리의 소중한 시간과 돈을 이 두 가지 중 어디에 써야 할지 망설인다.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성공 슬라임




동그란 원이 성공에 필요한 요소다. 괴생물체처럼 이상하게 생긴 슬라임이 대표와 조직의 역량이다. 튀어나온 부분은 평균보다 더 잘하는 영역, 옴폭 패인 부분은 부족한 영역이다. 남들보다 뛰어난 초록색 부분을 더 키우는데 에너지를 써야 할까? 남들보다 부족한 노란색을 메우는데 에너지를 써야 할까? 어쨌든 이 슬라임을 조물딱조물딱해서 저 원의 크기 안에 채워 넣으면 이기는 경기다. 강점을 더욱 강화시킬지, 약점을 보완할지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문제다.


이 결정과 함께 하나 더 감안해야 할 요소가 있다. 학습의 우선순위가 '내가 해야 하는 일'인지 '내가 좋아하는 일인지' 늘 헷갈린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두 가지는 대체로 일치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이미 초록색이 되어서 많이 튀어나와 있는 상태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그동안 (내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홀해져서 저렇게 오목렌즈처럼 납딱해져 있는 것이다. 영향력의 관점에서는 '해야 할 일'에 시간을 쓰는 게 맞을 것이고, 지속성의 관점에서는 '하고 싶은 일'이 유리할 것이다. 


이러한 학습의 방법과 우선순위를 정한 후 우리는 경영에 필요한 다양한 요소를 배워 나간다. 제품 경쟁력을 어떻게 향상시킬지, 마케팅을 어떻게 잘할지, 운영 관련 이슈를 어떻게 해결할지, 회계와 재무를 어떻게 정확하게 세팅할지, 이 모든 걸 어떻게 시스템으로 구축할지. 


다행인 건 각각 다른 영역처럼 보이는 이 요소들은 사실상 하나의 큰 공통분모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다. 어쩌다 대표가 된 후 본인의 밥벌이 숙제를 해결하고 난 후부터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한다. 그 대상이 가족이든, 여자친구든, 동업자이든, 직원이든, 알바이든, 거래처 관계자든, 대행사 담당자든, 대리인이든, 프리랜서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사람'이라는 교집합 속에서 이뤄진다. 결국 창업자가 배워야 할 건 크게 보면 '사람 배우기'다. 어떻게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을 움직이고, 사람을 이끌 것인가. 사람이라는 존재는 어떤 로직으로 작동하는가.


사람이라는 공통분모



사람에 대해서는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다. 사람의 뇌 프로그래밍은 해석도 어렵고 코딩은 더 어렵다. C++이나 자바나 어셈블리나 스칼라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어렵다고 알려진 이 프로그래밍 언어들은 세상에 태어난 지 불과 100년도 안 되었다. 하지만 인류는 200만 년 전부터 프로그래밍이 되어서 그동안 덕지덕지 끝없는 패치를 통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초기 프로그램도 뇌 어딘가에 숨어서 특정 조건이 되면 활성화된다. 1년에 한 번 패치를 했다고 가정하면 200만 년 동안 200만 번 패치가 이뤄진 셈이다. 최초 프로그래머는 이미 사라졌고, 중간 패치한 사람들도 사유를 기재해 놓지 않았다. 그냥 현존하는 우리끼리 코끼리 다리를 만지듯 어렴풋이 인간의 뇌를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경영은 어렵다. 사람에는 정답이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Ver.1부터 Ver.200,000까지 한 폴더에 다 집어넣은 디자인 시안 파일 같다. PM도 사라졌고, 기획문서는 파기되었으며, 디자인 목적도 이미 모호해진 상태다. 그냥 엉망진창인 최종본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무리 배우고 익혀도 언제나 '사람'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에 대해 배워야 한다. 창업을 안 했으면 상관없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어쩌다가' 대표가 된 걸 어떡하겠는가. 결국 경영이라는 건 해독 불가능한 암호처럼 어려운 사람이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여정이다. 왜인지도 잘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나를 믿고 소중한 청춘을 함께하는 이들이 있다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인생이 모여서 뭔가 대단한 걸 만들어 보겠다고 컴퓨터 앞에서, 회의실에서, 휴게실에서, 회식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 열띤 토론을 하며 타이핑을 하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에게 신념을 불어넣고, 열정을 일깨우고, 고난을 헤쳐나갈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는 것,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대단한지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곧 사람에 대한 이해이자, 사람에 대한 배움이자, 진정한 창업자의 학습일 게다. 


'어쩌다 대표'가 되었으니 어쩔 수가 없다. 사람에 대해 배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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