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오토바이 생존기
캄폿에서 조식을 먹고 체크아웃 후 시아누크빌로 이동하는 날. 전날 밤부터 A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시아누크빌에 가기 위해 달려야 하는 4번 국도(National Highway 4)는 여행객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다. 캄보디아 로드트립을 계획하면서부터 4번 국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들어왔기 때문에 겁이 나는 건 사실이었다. 캄보디아의 대표 항구도시인 시아누크빌과 수도 프놈펜을 잇는 이 고속도로는 각종 물류를 이송하는 대형 덤프트럭들이 줄지어 이동하는 도로라 초보 운전자들에겐 최악이라는 것이다. 4번 국도를 겪어본 여행객들은 오토바이 운전이 익숙하지 않다면 이 고속도로를 피하라는 충고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캄폿에서 시아누크빌로 가는 길은 하나다. 다른 길로 가고 싶대도 길이 없었다. 지도를 보니 가야 할 길의 절반은 3번 국도, 나머지 반은 4번 국도였다. 3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가 4번 국도로 들어선 후 시아누크빌 방향으로 쭉 달리면 되는 단순한 루트였다.
이미 프놈펜에서 캡까지 6시간의 여정을 겪어냈던 우리는 그 험하다는 4번 국도를 무사히 지나가기 위해 우리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캄폿에서 시아누크빌까지 구글 지도의 예상 시간은 2시간 반. 그 정도라면 실제로는 빨라도 세 시간 반은 걸릴 거였다. 조식을 먹고 출발할 거지만 시아누크빌에 예약한 숙소까지 약 95킬로미터를 달리는 중간에 더위를 피해 쉬어갈 만한 곳이 있는지 검색도 해 봤다.
갈만한 카페를 추려 A와 상의한 후 딱 4번 국도로 들어서기 전에 있는 곳을 이번 여정의 스탑오버로 정하기로 했다. 지난번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카페에서 쓸 돈도 따로 준비했다.
시아누크빌에서 묵을 숙소의 위치도 고민이 됐다. 결국 시내가 아닌 한적한 해변 앞으로 숙소를 잡기로 했다. 시내에 위치한 곳보다 빠르게 4번 국도를 벗어날 수 있고 조금이나마 빨리 도착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리고 조용한 곳에서 지내면 여행 계획을 짤 때 상상했던 것처럼 완벽하게 휴가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시아누크빌은 여행 계획을 짜면서 내가 가장 기대했던 도시였다. 시아누크빌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사진들과 호텔들을 보며 투명한 에메랄드 빛 바다와 상아색 모래가 있는 느긋하고 아름다운 동남아 휴양지를 상상했었다. 시아누크빌에서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코롱섬은 여행객들에게 지상낙원이라 불렸다. 해변에 누워 파도소리를 들으며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나를 떠올리자 하루빨리 그곳에 가고 싶었다. A도 내가 시아누크빌에 기대가 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튼 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으니 최대한 안전에 신경 쓰는 수밖에.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조식을 먹고 짐을 챙겼다. 벌써 두 번이나 짐을 풀었다 다시 꾸려봤다고 나름 규칙이 생긴 우리는 금방 배낭을 싸고 준비를 끝냈다. 선크림을 잔뜩 바르고 쿨토시도 빼먹지 않고 착용하고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캄폿의 호텔 방과도 작별인사를 했다. 나중에 또 올게!
기종이 스즈키 어드레스라 '수키 Suki'라는 이름을 붙인 우리 오토바이에 자잘한 짐을 싣고 있는데 캄폿에서 머무는 며칠간 매일 보며 인사를 나눴던 호텔 매니저 코살이 아쉬운 표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늘 캄폿을 떠나는 거야?
그가 우리에게 물었다. 그 사이 정이 들었는지 떠나는 우리 마음도 아쉬웠다.
-응, 이제 시아누크빌로 가는 거야.
조심히 가라며 코살이 우리에게 작게 포장된 캄폿 산 후추를 내밀었다. 예상치 못한 선물이 너무 고마웠다. 그리곤 그가 먼저 우리에게 사진을 함께 찍자며 카메라를 들어 올리고선 활짝 웃었다.
코살이 나에게 자기 명함을 한 장 건넸는데 그러면서 그가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는 A도 나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나중에 그의 명함에 찍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을 때도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코살이 어떤 이유로 우리에게 명함을 주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자기 이름을 알려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하고 짐작해볼 뿐이다.
호텔에 상주하듯 늦은 밤에도 이른 아침에도 일을 하고 있었던 사진 속 그의 얼굴엔 미소와 함께 고단함도 묻어났다. 코살은 이번 캄보디아 여행에서 만난, 몇 안 되는 소중한 인연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코살과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호텔을 빠져나와 가까운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넣은 우리는 시아누크빌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날 처음으로 오토바이 위에서 에어팟을 한쪽씩 나눠 껴봤다. 덜컹거리는 오토바이 때문에 혹시나 귀에서 빠질까 봐 그전까지는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음악이 있으니 고속도로가 덜 무섭기도 하고 같은 음악을 들으며 이 순간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40분쯤 달렸을까, 스트레칭을 하려고 잠시 갓길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길이 나쁘지 않아 빠른 속도로 쭉 달려온지라 벌써 꽤 많이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라면 카페에서 쉴 필요 없이 시아누크빌까지 달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A도 최대한 빨리 다음 숙소에 도착해 쉬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아직 4번 국도에 들어서지도 못했는데 대형 덤프트럭들이 줄지어 나타나고 도로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포장이 다 벗겨져 붉은 흙이 도로에 처참히 드러나 있었다. 차라리 그냥 흙길이었다면 나았을 텐데, 포장이 곳곳에 남아있어 도로가 엄청나게 울퉁불퉁했다.
좁은 이차선 도로 앞뒤로 무서운 크기의 대형 트럭들이 덜컹거리며 이동하는 바람에 우리는 오토바이를 최대한 오른쪽으로 바짝 붙였다. 군데군데 패인 구덩이와 포장도로의 흔적들이 운전을 어렵게 만들었다. 여기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대형사고였다. 게다가 직선도로도 아니라서 트럭이 조금만 오른쪽으로 다가와도 우리에겐 위협적이었다. 트럭 바로 옆에서 달리게 되는 것도 위험했고 오른쪽으로 붙는 트럭을 피하려다가 나무에 부딪힐 수도 있었다.
우리와 함께 길을 달리는 다른 오토바이들을 살펴봤다. 현지인들은 어떻게 운전하는지 살펴보니 오히려 그들은 거침없이 달리는 것이었다. 오른쪽에만 바짝 붙지 않고 울퉁불퉁한 부분을 피해 트럭과 자동차들을 앞지르며 운전해 가는 그들은 꽤나 편안해 보였다.
우리는 이 도로가 너무 익숙해 보이는 한 오토바이를 따라 운전하기로 했다. 역시나 그들은 도로의 고르지 않은 부분을 정확히 피해 가장 평평한 곳으로 달리고 있었다. 압도적인 크기의 대형 트럭이나 속도를 낮추지 않고 달리는 차들이 무서웠지만 현지인들을 뒤따라 달리며 얼른 이 도로를 벗어날 수 있길 기도했다.
도로가 거의 시뻘건 흙길이다 보니 도로 위의 온갖 것들이 내뿜는 먼지를 다 뒤집어쓰게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겨우겨우 최악의 구간을 벗어나 갓길에 잠시 오토바이를 세웠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도 입에서 흙이 씹힌다며 A가 볼멘소리를 냈다.
그리고 A가 걱정과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스피드 미터가 망가진 것 같아.
언제부터 망가진 거냐는 나의 놀란 물음에 A는 자기도 잘 모르겠다며, 도로를 달리다가 속도를 보려고 스피드 미터를 확인했는데 바늘이 계속 눈금 0만 가리키고 있었다고 했다. 여기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시아누크빌에 도착해 손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쉬어가기로 계획한 카페가 그래도 꽤 가까이 있었다. 이제 길은 흙길이라기 보단 포장이 처참하게 다 까진 아스팔트 도로가 됐다. 오토바이는 엉덩이가 아플 정도로 덜컹거렸다.
아주 살-짝 헤매긴 했지만 카페를 찾아 옆에 있는 주차장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오토바이를 도로 반대편으로 돌려야 하긴 했지만 딱 시아누크빌로 지나가는 길목에 있어 잠깐 쉬었다 가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뜨겁게 달궈진 헬맷을 벗으니 흙먼지와 땀에 뒤덮인 우리 몰골이 웃겼다.
카페에 들어가 물도 사고 커피도 주문한 후에 보니 신발은 물론이고 양말부터 레깅스까지 붉은 흙먼지로 다 뒤덮여 있었다. 심지어 얼굴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도 붉은 먼지로 얼룩덜룩했다. 배낭들은 물론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꼬질꼬질하게 흙먼지가 묻은 우리 몰골은 누가 봐도 떠돌이 같았다. 인정사정없는 도로를 달려오느라 몸도 마음도 너무 피곤했지만 재밌었다. 도로 사정이 어이없긴 했지만 웃음이 났다. 진짜로.
차들과 구덩이를 피해 달리느라 고생한 A는 소파에 널브러지듯 앉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전날 밤 우리는 4번 국도가 너무 험하다면 다시 오토바이를 돌려 캄폿으로 돌아가기로 했었다. 이때만 해도 A가 오토바이 운전에 자신이 없었던지라 캄보디아에서 위험하기로 악명 높은 도로를 운전해야 한다는 것이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무섭다며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에게 말했었다.
-네가 무서우면, 네가 판단했을 때 위험하다고 느껴지면, 우리 굳이 목적지까지 갈 필요 없어. 그냥 오토바이를 돌리면 돼. 숙소는 환불받지 뭐. 네가 무서워하는데 굳이 거기까지 가자고 전혀 우기고 싶지 않아. 굳이 그 도시에 가지 않아도 돼. 어차피 캄보디아는 신기하고 새로운 곳 천지인걸. 어디로 갈지 다시 캄폿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되니까. 알겠지? 걱정하지 마.
내 말을 들은 A가 풀 죽은 표정으로 진짜? 하고 되물었다.
-응. 아니라고 느껴지면 언제든 돌아가면 돼.
곱슬거리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전날 밤에 이렇게 결정했건만, 아직 4번 국도에 올라보지도 못했는데 3번 국도가 이렇게나 험하다니. 지친 표정으로 멍하니 소파에 앉아있던 A가 커피를 들이키며 물었다.
-4번 국도가 위험하면 돌아가기로 했는데, 못 갈 거 같지? 난 차라리 4번 국도가 나을 것 같애.
나도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응, 진짜 못 돌아가겠다. 엄두가 안 나.
카페에서 나와 다시 시아누크빌 방향으로 달리면 곧 4번 국도로 들어서게 된다. A도 나도 무자비한 도로를 겪고 나자 4번 국도에 오를 용기가 생긴 것 같았다. 와, 근데 쉬어갈 만한 장소를 미리 알아보길 잘했다. 확실히 처음 고속도로에 올랐을 때보다 준비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4번 국도는 걱정했던 것보단 괜찮았다. 한 시간 가량을 4번 국도에서 보내야 하기는 했지만 앞서 겪은 도로보다야 훨씬 나았다. 이차선이지만 차선도 없었던 흙길과 달리 적어도 차선이 잘 그어진 이차선 도로였기에 트럭이나 차가 많더라도 조심해서 운전하면 되었다. 확실히 여행객들의 말처럼 차들과 트럭들이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는 했다.
이따금 겁이 난 건 사실이었지만 한쪽 귀에 꽂힌 에어팟에서 들리는 음악소리가 도움이 됐다.
이년 전 A가 나를 만나기 위해 자가격리를 해가며 한국에 방문했을 때, 같이 한강을 따라 자전거를 탄 적이 있었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공원에서 잠깐 손을 잡고 나란히 자전거를 탔는데 그때 들었던 노래를 지금 오토바이를 타며 듣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마법 같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스피드 미터가 작동하지 않아 A가 불안해한 것 빼고는 지레 겁먹었던 게 무색해질 만큼 괜찮은 도로였다. 물론 다른 여행객들이 왜 위험하다고 하는지도 느낄 수 있었지만 외곽에 숙소를 잡은 우리는 4번 국도를 끝까지 달릴 필요가 없었다.
국도를 빠져나와 한가한 도로를 달리는데 옆으로 보이는 풍경이 진짜 아름다웠다. 호수도, 산도, 바위도 캄보디아만의 정취를 듬뿍 담고 있었다. 조금 더 달리자 바다가 보였다. 이 해변이 보이는 곳에서 지낼 거라니! 반짝이는 바다와 파도 소리에 A도 나도 신이 나기 시작했다.
딱 이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시아누크빌에서 보낼 기대만 가득했던 우리는 몇 시간 만에 이 도시가 내뿜는 기이한 기운에 자꾸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