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 알랭 드 보통 / 청미래
참 읽기 좋게 잘 쓴 글이다.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지만 한 쪽으로 쓸려거지 않도록 단단한 지적 토대에 닻을 내리고 있는 글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빠져들지만 휩쓸리지 않는다.
그의 말처럼, 여행을 생각할 때면 내 마음은 벌써 야자수 그늘이 있는 바닷가에 가 있다. 하지만, 내가 있는 곳과 바닷가 사이는 공백이나 진공이 아닌 두 장소를 이동하는데 필요한 비자, 비행시간, 환승, 옆자리 승객, 바가지 요금 등등의 수 많은 것들로 채워져 있다. 우여곡절 끝이 여행지에 도착해서 한 숨을 돌리고 나면 머지 않아 마치지 않고 두고간 일이나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밀려들어온다. 때문에 정작 눈앞에 있는 광경은 희석되고, 결국 근심스러운 미래에 의해서 현재가 끌려나오고 만다. 여행은 대체로 그렇다. 숭고하고 경외로운 경험이라도 그 앞에서 몇 분이 지나면 그곳에 가기위해 아침을 굶었거나, 무리하게 휴가를 냈거나, 조금전에 여행을 같이온 사람과 소소한 말다툼 탓에 우리 마음은 얼마전에 떠나온 출발지를 배회하게 된다. 그래서 여행은 즐거운 것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 때가 있다.
사람들에게 데생을 가르친 러스킨을 통해 서술한 아름다움의 소유가 인상적이다. 아무리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림을 그리려 하면 그냥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살피게 되기 때문에 그 대상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고, 어쩌면 소유할 수도 있다. 저렴해진 메모리와 디스크 덕에 여행지에서 매일 몇 백장의 사진을 찍으며 마치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사진은 이제 내것이고 언제든 꺼내서 볼 수 있으니, 자동적으로 아름다움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지만 며칠간의 여행을 마치고 남은 천여장 사진들은 어디에 있는것일까.
프로방스로 짐작되는 어느 한적한 풍경이 표지에 쓰였다. 여행광고나 책자에 쓰일만한 평범한 사진이고 누가 보더라도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냥 괜찮네보다는 훨씬 잘 만든 표지다.
하늘을 크게 잡아서 언듯보면 점점 짙어지는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를 찍은듯 하지만, 사진은 땅에 단단히 닻을 내리고 있다. 마치 작가의 감상이 단단한 지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어디로든 떠나는 여행과 언젠가는 도착할 그곳을 잘 보여준다. 가운데 있는 갈색 액자가 절묘하게 관점을 반전한다. 만일 액자가 없었다면, 이 표지사진이 마치 마르세이유에서 빌린 렌트카를 운전하던 내가 잠시 길가에 서서 바라보다가 찍은 풍경으로 보였을것 같다. 항상 꿈꾸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나는 액자에 담긴 하늘과 비행기를 본다. 이제 누군가의 여행을 보는 독자 혹은 관객이 되는 거다. 직접 런던을 가려다가 그만둔 데제생드 공작이나 방구석 여행자 드 메스트르처럼, 의자에 앉아서도 멋진 여행을 하고 일상의 장소와 사물 속에서도 탐험가가 될 수도 있다. 이제 시간이 없고 돈이 없다고 여행을 할 수 있고 우연히 마주치는 아름답고 경외로운 것을 러스킨의 눈으로 보는 여행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