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ger beach links / Qingdao, China
다시 중국에 왔습니다. 인천에서 수평으로 선을 그으면 가장 먼저 닿는 산동반도의 칭다오입니다. 백령도에서 첫 닭이 울면 그 소리가 들린다고 할 만큼 가까운 곳이지만 이곳에 대한 기억이 오래전 학창 시절에 배웠던 장보고와 신라방에서 멈춰 있는 내게 이곳은 그냥 낯선 중국 도시일 뿐입니다.
시내로 향하는 택시에서 내다보는 풍경이 여느 도시와 달라 보입니다. 빈틈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쳐 있는 울타리와 널찍하고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넓은 공터들 때문입니다. 금방이라도 이 공터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건물과 공장을 지어 올릴 것 같은, 마치 도시 전체가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이와 비슷한 것을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을 받습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던 빈 땅에 울타리가 생기면서 젠트리와 요먼은 부자가 되고 젠틀맨이 되었지만, 농사를 짓던 곳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도시로 이동해서 임금노동자가 되었던 인클로저 운동과, 그로 인해 시작된 변화가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곳을 거치면서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거대하고 더 빠른 속도로 이곳에 도착한 것입니다. 이 쓸쓸한 데자뷔는 예전이면 자손의 봉양을 받고 있을 노인이 다 합해도 얼마 되지 않을 물건들을 늘어놓은 가판을 밤늦도록 지키게 하고, 따뜻한 국에 밥 말아먹는 저녁에 맞춰 가족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자본주의가 정말 인간의 본성에 가장 잘 부합하는 제도이고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 행복해졌냐고 당신은 내게 물어보겠지만 나는 그 질문을 피하고 싶습니다. 가족도 공동체도 종교도 무력해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제 우리는 누구나 혼자라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 * * *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될 것 같은 붉은 흙이 드러난 비포장 도로를 지나 도착한 타이거 비치 링크스의 첫인상이 미묘합니다. 조금 전에 봤던 너절한 도로와는 달리 손바닥만 한 기와로 단장한 단층 건물과 잘 손질된 잔디밭이 너무 깔끔하고 세련되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강한 바닷바람과 길고 질긴 러프가 기를 죽이고, 항아리 벙커는 빠지면 나올 수 없는 늪 같아 보입니다. 마치 페어웨이와 그린을 제외한 모든 곳이 해저드로 보입니다.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아시아 유일의 정통 링크스코스가 바로 이곳이라고 했을 때 사실 나는 코웃음 쳤습니다. 돈을 들이붓는다고 명품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직접 와서 보니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가 뜨면 코스가 열리고, 해가 지면 닫는 코스이고, 누구나 자기 발로 걸어서 라운드를 해야 하는 그런 곳이기 때문에 이런 세팅은 더 많은 손님을 받고, 코스의 회전율을 높히기 위한 꼼수와는 거리가 한참 멀기 때문입니다. 이번 여행에 동행한 Y에게 공울 몇 개 가지고 왔냐고 물어봤더니 두 슬리브, 여섯 개를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그걸로 이렇게 어려운 코스에서 두 라운드 할 자신 있냐는 농담을 서로 던지면서 오늘의 라운드를 시작하기로 합니다.
1번 홀로 가려고 하는데 스타터가 거기는 토너먼트가 진행 중이라며 인코스 10번 홀로 가라고 손을 내젓습니다. 아쉽지만 시간에 쫓기는 여행자는 포기에 익숙해져야만 합니다. 맞바람이 부는 첫 홀은 440야드의 긴 파 4 홀입니다. 페어웨이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연못에 사방은 사실상 해저드인 길고 질긴 러프입니다. 티샷을 잘한다고 해도 다음 샷에서 해저드를 넘겨 레귤러 온 하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정말이지 플레이어의 기를 죽이는 시작입니다.
넓은 벌판에 누군가가 陣을 펼쳐놓았습니다. 자신의 운을 시험하는 사람이 지는 사람입니다
예상대로 참 어렵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바람과 사방이 트인 환경이 주의를 흩트리며 이 코스를 더욱 어렵게 느껴지게 합니다. 누군가가 펼쳐놓은 陣에 갇힌 것처럼 마주하는 홀마다 어디로 가는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전반을 마칩니다.
전반을 마치고 그늘집에서 잠시 쉬었다가 아웃코스의 1번 홀 티박스에 올라서니 그제야 아까 여기서 시작했었어야 했었다는 아쉬움이 듭니다. 널찍한 첫 번째 홀에서 설계자는 그가 앞으로 사용할 무기들을 하나하나 꺼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집을 부려서라도 1번 홀부터 시작했더라면 지리멸렬하지 않았을 것 같아 참 아쉽습니다.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아웃코스를 시작합니다. 아까와는 다른 게임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8번 홀에서 오늘의 클라이맥스를 만납니다. 뒤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타면 다소 욕심을 부려도 될 것 같은 500야드 파 5입니다. 여기에서 팽팽하던 Y와의 승부가 결정될 것 같습니다. 페어웨이도 넓고 그린 좌측의 해저드 말고는 장애물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막상 티박스에서 보니 티샷 낙하지점이 타이트합니다. 좌측에는 대여섯 개의 작은 벙커들이 모여있고 오른쪽은 경사가 심한 언덕이고 언덕 너머는 깊은 러프가 조성된 나 같이 욕심내는 자들을 방어할 탄탄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가 공격에 실패한 사이에 차분히 정석대로 코스를 따라온 Y는 핀에서 한 뼘 거리에 서드샷을 붙여서 모든 승부를 원점으로 돌립니다. 좋은 샷에 대한 보상과 실수에 대한 응징. 참 멋진 홀입니다.
9홀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에 잠시 뒤를 돌아봅니다. 어둑해지는 들판은 러프도 페어웨이도 해저드도 구분이 없는 바람 언덕이 되어갑니다. 조금 전까지 명운을 걸고 한탄하며 기뻐하던 플레이어들이 떠난 곳에 어제와 비슷한 오늘이 다시 내일로 바뀌어 갑니다.
* * * *
어느 홀에선가 양 떼를 몰고 가는 나이 든 목동과 마주쳤습니다. 일평생 이곳에서 양 떼와 함께 동화처럼 늙어왔을 것 같은 모습입니다. 그의 주름진 웃음이 중국이 거쳐왔던 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드라마틱했던 중국의 과거와 겹쳐 보입니다. 조용하던 어촌 마을이 인구 천만의 도시가 되는 동안 그의 삶도 엄청난 변화를 겪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양 떼를 몰고 다니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성장의 시대에는 끼리끼리 나눠 먹는 꽌시에 끼지 못하는 사람이고, 침략과 내전의 시기에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어느 깃발에 경례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를 걱정했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맥주 한 잔을 놓고 Y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멀리서 보는 역사는 단순한데 가까이 있는 인생은 얼마나 복잡한가에 이르러 잠시 말이 없어집니다. 이 땅에서도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하고,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철칙은 깨지지 않습니다. 누구도 자신이 앉아있는 설국열차의 앞칸 자리를 꼬리 칸과 바꾸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선택한 상황이 아니라 이미 주어지고 전승된 상황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인간이 나와 너는 다르지만 같다는 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가슴에 별을 품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별을 잉태할 수도 없는 나는 차라리 칭다오를 그냥 좋은 맥주가 만들어지는 곳으로 기억하기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