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밖으로 잠기는 문

Villamor Air Base / Manila, Philippine

by 달을보라니까


마닐라 공항 라운지에서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출국 심사를 마치고 국경과 국경 사이의 애매한 공간에 앉아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은 무언가로부터 벗어난 듯 마음이 편안합니다. 공항 라운지는 출장이나 여행을 마치거나 시작하는 곳이기 때문에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들 뭔가에 분주하고 나도 그래야 할것 같습니다만 나는 조용히 앉아있기를 좋아합니다.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의 들뜨고 기쁘고 지치고 불안한 표정들과 여권을 대조하고 짐을 검사하며 사람들을 의심하는 대가로 살아가는 사람들. 매년 수백만 명이 오가지만 누구도 오래 머물지 않는 이곳에 주인처럼 자리 잡은 프로세스와 일정들의 똑같은 어제와 오늘, 내일이 뒤섞여서 뿜어내는 독특한 현대적 느낌은 마치 내 시간은 정지해 있지만 다른 사람과 사물의 시간은 몇 배속으로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킵니다.


오늘 아침에 발표장에 일찍 도착해서 동료들이 장비들을 설치하는 동안 마실 물을 사러 가는 길에 작은 예배당인 채플을 발견했습니다. 은행의 본점 건물에 종교행사를 위한 장소가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 들여다보고 있자니 몇 번의 미팅으로 안면을 튼 에스더가 지나가다가 나를 보고는 캐톨릭 신자냐고 묻습니다. 글쎄, 그건 어떻게 보냐에 따라 다르다고 했더니 무슨 소리냐고 재미있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봅니다. 어린 시절에 성당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을 다녔고, 아내가 요구한 유일한 결혼의 조건이라서 세례를 받았다고 설명하자 애스더가 웃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필리핀은 국민의 절대다수가 로마 가톨릭을 믿는 사실상의 종교 국가이지만 이곳의 가톨릭은 유럽과는 달리 토테미즘이나 십자가나 묵주 같은 상징물을 숭배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합니다. 믿을 수 없는 국가보다는 종교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이곳의 낮은 생활 속에 자리 잡은 카톨릭이 어쩌면 먼 옛날 종교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기능과 유사하지 않겠냐는 그의 말을 들으며 은퇴가 몇 년 남지 않았다는 에스더를 이곳이 아닌 곳에서 만났더라면 계약이나 돈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나눌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발표를 마치고 지난 이틀 동안 함께했던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이곳을 떠나기 전에 아까의 채플에 다시 들러 봤습니다. 작은 방이었습니다. 별다른 장식 없는 제단과 조악한 스태인드글라스 그리고 평범한 성모 마리아상 앞으로 서른 명 남짓 다닥다닥 앉을 수 있는 소박하고 낡은 곳입니다. 이곳 사람들의 운명은 여기에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정치가들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인한 종이에 의해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진 착취의 고단함을 위로한 것 또한 저들의 종교라는 역설을 짧은 점심시간을 쪼개서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전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냐는 대답을 들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내게 그럼 너는 여기에 왜 왔느냐는 질문을 받을까 겁이 나서 입을 닫습니다.


건물을 나서는 내게 보안요원이 어깨에 멘 산탄총과 어울리지 않는 밝은 미소로 Have a good day, sir라고 합니다. 이 땅의 주인들이 사는 세상에는 客이 알지 못하는 구원과 위로가 있기를 바라며 Good day to you, too라고 웃으며 택시를 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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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모어 공군 골프장은 마닐라에서 몇 안 되는 퍼블릭 코스입니다. 예약을 위해 전화를 했더니 내 이름을 물어보는 대신에 토너먼트 예약이 없다고 말하는 거로 봐서는 그리 좋은 골프장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을 뿐더러 공항으로 가는 길에 들릴 수 있고 주변 치안도 좋다는 호텔 직원의 말을 따르기로 합니다.


체감온도 38도, 그러나 바람도 꽤 불고 업다운이 없는 평평한 코스라서 카트를 타는 대신 걷기로 했습니다. 캐디 크리스틴이 풀카트를 가지러 간 사이에 스타터 옆의 작은 창고에 가득 쌓여있는 나이 든 클럽 중에서 그립과 페이스가 괜찮은 것들을 찾아 나오니까 벌써 땀이 범벅입니다. 처음 보는 브랜드의 클럽인 데다 헤드가 작은 블레이드 타입에 너무 묵직해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한증막 같은 창고에 다시 들어간다 해도 더 나은 것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꺼내온 클럽을 그냥 쓰기로 합니다.


첫 홀 주변이 좀 분주합니다. 오른손잡이가 어드레스를 하는 정면에는 일을 기다리는 캐디들과 로스트볼을 팔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모여서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등 뒤에는 깃발 몇 개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아직 첫 샷도 안 했는데 벌써 골프장을 잘못 골랐다는 후회와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조금 전까지 못 봤던 간판에 손으로 쓴 듯한 필체의 Happy golfing이 보입니다. 아까 만났던 산탄총을 멘 경비의 낙천적인 웃음처럼 저 글씨를 새겼던 사람이 웃고 있는 듯합니다. 오후 3시가 되도록 캐디 일을 못 받아서 하루를 공친 캐디도, 얼마나 오랫동안 가지고 다녔는지 모서리가 반들반들해진 골프공 상자를 들어 보이며 내게 골프공을 사라고 하는 사람도 내가 모르는 그들만의 위로와 구원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집니다.



세월을 뒤집어쓴 담벼락과 키 큰 나무들 옆으로 오늘 하루를 공친 나이 든 남자 캐디가 천천히 지나갑니다.


캐디 크리스틴과 악수하고 오늘 라운드를 시작하는데 이 친구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내가 스윙을 하는데 뒤에 서 있다가 자꾸 움직여서 그러지 말라고 하는데 반응이 미지근합니다. 세컨샷 지점으로 걸어가는데 아이들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립니다. 한 녀석이 웃으며 도망가고 다른 하나가 쫓아갑니다. 장난감이 없어도 즐겁게 뛰어노는 애들을 보는데 크리스틴이 뒤 팀 기다린다고 빨리 가자고 눈치를 줍니다. 다소 어이가 없었지만 그러자고 하는데 목표까지 남은 거리를 내 생각보다 훨씬 다르게 불러줍니다.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크리스틴의 말이 맞겠지 했지만 두번 세번 계속 짧습니다.


200야드가 더 되어 보이는 4번 홀 파3의 그린 우측에 버티고 선 깊숙한 벙커가 욕심부리지 말고 땅콩 그린의 좌측으로 짧게 치라고 말합니다. 크리스틴은 180야드라고 합니다. 180보다는 더 될 것 같은데 싶으면서도 크리스틴이 주는 5번 아이언으로 핀을 노려 친 샷이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더니 벙커에 떨어집니다. 뭔가 잘못됐습니다.


퍼팅을 마치고 스코어카드를 찬찬히 읽고 나서야 거리 기준이 그린 입구까지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크리스틴이 말해준 거리도 그린 앞까지인 것 같아서 물어보니 그렇다고 합니다. 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됐냐고 물어보니 6개월이라고 하기에 그냥 알았다며 오케이하고 말았습니다. 잠시의 게으름이 뒤통수를 맞습니다.


전반을 마치고 기다리는 동안 콜라 두 병을 사서 크리스틴에게 하나를 주며 남은 거리를 알려줄 때 기준점이 어디인가를 꼭 말해줘야 한다는 것과 골퍼가 어드레스를 하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고, 스윙을 시작하면 절대로 움직이거나 큰 소리 내지 말라는 따위의 몇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을 이야기해 줬습니다. 깜짝 놀라면서 자기가 그랬냐고 묻기에 그랬었다고, 그래서 나는 불편했었다고 말해줬습니다.


마지막 홀을 마치고 잠시 서서 뒤를 돌아봅니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홀이 없어서 아쉽기만 합니다. 낮은 언덕 몇 개 말고는 업다운이 없고 좌우도그렉도 없어서 플레이어를 압박하지도 않고 전략적인 선택을 할 여지도 거의 없는 밋밋한 곳이라 이곳에서는 군인들이 체력 훈련하듯 전진만 합니다. 아마도 여기에 다시 오지는 않을 것 같지만 언젠가 이 앞을 지나칠 때면 내 티샷을 냉큼 먹어버린 9번 홀의 나무와 더웠던 오늘을 기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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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데 크리스틴이 가지 않고 서 있습니다. 아까 분명히 캐디팁을 줬는데 내가 뭘 잊었나 싶어서 물어보니까, 사무실에 항의할 거냐고 묻습니다. 아까 전반이 끝나고 쉬면서 몇 가지 조언을 해줬던 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는 그 일을 바로 잊어버렸지만, 그녀는 오후 내내 전전긍긍했을 생각을 하니 미안해졌습니다. 아니라고, 캐디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아서 알려준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고는 이제 괜찮냐고 are you happy now? 하고 물어봤습니다. 그렇다고 yes, I’m happy now라고 대답하는 크리스틴을 보면서 영어로는 행복하냐고 묻기도 답하기도 이렇게 쉬운데 똑같은 질문과 대답을 한국말로 한다면 상대방은 나를 어떤 표정으로 쳐다 볼까 싶습니다.


가진 것 없어도 행복하다고 말하고 행운을 빌어주는 저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갇혀있는 개념의 방을 생각합니다. 내게 행복이라는 말은 너무나 거대하고 고귀해서 꺼내 보기도 어렵지만, 저들에게 행복은 생활의 크기만큼 작게 나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갇힌 방의 문손잡이는 거꾸로 달려 있어서 밖으로 잠깁니다. 강자와 승자들이 오랜 시간 설계하고 실행시킨 거꾸로 달린 문손잡이는 쉽게 말하고 나눌 수 있는 위로와 낙관 대신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구원과 행복을 기다리게 합니다.


얼마나 많은 문이 밖으로 잠기는가를 가만히 따져 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손잡이들을 하나씩 반대로 돌려 다는 날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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