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npearl, Nha Trang, Vietnam
가족과의 휴가 일정을 이리 저리 맞추다가 결국 포기하고 차라리 내 베트남 출장일정이 끝나는 날에 맞춰서 가족들이 베트남으로 와서 하노이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트랑으로 알려진 나짱(Thành phố Nha Trang)에 가기로 했습니다.
베트남은 내게 특별한 곳입니다.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알게 된 전화번호 하나로 시작해서 새로 시장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계획대로 된 일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이 훨씬 많았던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지연된 일정과 늘어난 비용을 해결하기 위해 홍수 난 거리를 헤치고 모인 사람들과 물에 젖은 신발을 벗어놓고 몇 시간이고 머리를 맞대기도 했었고, 같이 일을 하기로 했던 파트너가 막판에 마음을 바꾸는 바람에 난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10년이 지난 이제는 익숙해졌고, 시도때도 없이 불쑥 나타나는 오토바이도 쉽게 흘려 보낼만큼 편안해졌습니다.
내가 편안해하니까 같이 있는 가족들도 편하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넘치는 길을 유유히 무단횡단하고, 이천 원짜리 분짜를 먹고, 어딘가 흘려도 크게 찾지 않을 몇백 원을 더 주느냐 마느냐 흥정하면서 삼천 원짜리 셔츠를 고르며 엉덩이 하나 붙일만한 작은 목욕탕 의자에 앉아 연유를 탄 진한 베트남 커피와 사이다를 마시며 하루를 보냅니다. 덩치가 커진 아이들과 한 방에서 부대끼기 힘들어서 이번에는 방을 두 개 잡고 닮은 사람끼리 방을 쓰기로 합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누가 누구와 닮았냐를 한참 따지다가 둘째와 침대에 나란히 기대 누워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잠깐 책을 들었다가 어느새 잠이 듭니다.
* * * *
나짱에 도착해 공항을 나서자 뜨거운 열기가 덥칩니다. 36도입니다. 낮에는 햇살이 아쉬운 러시아 관광객들이 해변가 거리를 메우고 있습니다. 해가 기울고 밤이 시작되면 야트막한 건물들 사이에는 어디선가 나타난 다양한 국적의 복작대는 관광객들로 작은 도시 전체가 들썩입니다. 동양인은 중국 사람 아니면 한국 사람이고 서양인은 거의 러시아 사람인 듯 메뉴판은 키릴문자와 한자 그리고 한글로 가득합니다.
더워지기 전에 다니겠다는 욕심에 새벽에 일어나 일출을 보고 몇 군데 구경을 다니다 보니 어느새 가족 모두 땀 범벅이 됐고 배가 고프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맛집이고 뭐고 눈에 띄는 첫 번째 가게에 들어가기로 하고 해산물로 점심을 먹고 나니까 가족들은 지쳤고 더이상 땡볕에 돌아다니기 싫다며 호텔로 가고 싶어 합니다. 잘 됐다 싶어 얼른 돌아가서 가족이 샤워하는 사이에 호텔 직원에게 부탁해 골프장을 예약합니다. 만사 오케이입니다. 저녁 먹을 때까지는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빈펄리조트로 향합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봤을 때 테마파크는 쪼끄만데 골프장만 크다고 작은 아이가 불평했던 바로 그골프코스입니다. 오후 2시니까 혼자서 트와일라이트를 하면 해가 지기 전에 게임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등록을 마치고 기념품 몇 개사서 바깥에 나와 직원이 렌탈 클럽을 가지고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골프 코스가 상당히 좋아보입니다. 렌탈 클럽을 챙기면서 보니 신경 쓴 티가 납니다. 그립도 최근에 갈았고 중간에 빠지는 것 없이 웨지도 같은 시리즈로 잘 맞춰 놨은게 사실 내 클럽보다 더 좋아 보입니다. 베트남의 경제 성장과 그에 따라 높아지는 사람들의 취향을 맞추기 위한 것인듯 합니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엔 이들도 남들과 다르지 않게 될 것 같습니다.
연습볼 몇 개를 치고 바로 출발하려고 하는데 다른 싱글 플레이어 한 명이 나타났습니다. 연습 공을 치는 모습을 보니 저 사람하고 조인하면 해지기 전에 끝내기 힘들겠다 싶어서 얼른 가하려고 하는데 스타터가 딱 붙잡더니 둘이 조인해서 가라고 합니다. 오늘의 파트너가 된 스티브는 혼자 라운드하는 줄 알고 왔다가 나와 조인하게 되어 심심하지 않겠다며 좋아합니다. 10번 홀로 가서 시작하라기에 나는 조금 기다리더라도 1번으로 가겠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스티브가 너무도 큰 소리로 오케이 하는 바람에 더는 말을 못 하고 말았습니다.
첫 홀은 오르막 파 3입니다. 설계자가 첫 홀을 이렇게 만들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뒤틀린 시작이 아쉽습니다만 그래도 골프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13번 홀에서 내리막 130야드 파 3를 만납니다. 좌측으로는 유럽풍의 호텔이 보이고 다른 쪽으로는 바다가 보이는 멋진 홀입니다. 그린 앞쪽으로 경사가 심해서 짧으면 굴러 내려올 것 같습니다. 안전한게 나을 것 같아서 8번을 달라는데 길게 치면 내리막이라 퍼팅이 아주 어렵다며 캐디 니가 자꾸 9번을 들려줍니다. 그린 앞을 맞은 공이 멈칫하더니 내리막을 타고 바닥까지 내려옵니다. 내 생각대로 해야 했는데 아깝습니다.
8번 홀 티박스에서 뒤돌아본 전경에는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바다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다들 만만치 않은 홀들입니다. 가파른 언덕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9번 홀에서 욕심내지 않고 우드로 티샷을 했는데 긴 슬라이스가 나서 이번에는 드라이버로 다시 티샷을 했는데 이번에는 좌측 해저드에 빠졌습니다. 코스가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고 공을 달랑 네 개만 가지고 왔는데 큰일 났습니다.
14번 홀을 마치고 나오는데 앞에 있던 사람이 조인해도 되겠냐고 묻습니다. 러시아 사람입니다. 이제 호주, 러시아, 한국 사람이 뭉친 다국적군이 됐습니다. 무역업한다는 피터는 선한 웃음과는 달리 마치 우락부락한 체격이 당당해 보입니다. 러시아어로는 표토르냐고 물어보니까 반가워하면서 한국 대통령 박근혜를 안다고 하기에 ex-president라고 고쳐주고, 나도 스트롱 맨 푸틴 안다고 했더니 한참 웃더니 더이상 대통령 이야기 하지 말자고 합니다.
17번 홀 파5는 경치가 아주 좋습니다. 바다와 산이 한 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홀입니다. 저 멀리서 산을 깎아 길을 내는 모습이 보이기에 저기도 뭔가 만드나 보다 싶어서, 스티브에게 너희 나라의 광산도 한국처럼 굴을 파고 들어가야 하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하는 것은 노천광산이라 합니다. 그러면 트럭 대놓고 퍼 담으면 되는건가 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스트브는 빙긋 웃으며 그게 보기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착공하는 시점에 목표로 하는 깊이와 해당 지점의 지질 그리고 그에 따른 면적을 정교하게 계산하지 않으면 큰 손해가 날뿐더러 사고가 나는 경우도 많아서 상당히 위험부담이 큰 사업이지만 열심히 하는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정직한 사업이라고 한참을 설명해 줍니다.
마지막 홀에 왔습니다. 페어웨이는 스트레이트 평지인데 그린이 급격한 내리막이라서 세컨을 조심하라는 캐디의 조언을 들으며 차근 차근 그린으로 올라와 퍼팅으로 오늘 게임을 마무리합니다. 같이 라운드한 친구들에게 인사를 나눕니다. 뭉툭한 코와 짧은 목에 근육질 덩치를 보면 꼭 러시아 마피아 같은 피터와 공항에서 마주쳤으면 서로 눈길도 주지 않았을 스티브 그리고 나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시 자신의 우주로 돌아간 후에 잠시 뒤를 돌아봅니다. 언젠가 나짱에 다시 온다면 꼭 다시 라운드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가지고 갔던 공 네 개를 모두 잃어버리고 기념품으로 샀던 로고볼 세 개 중에 겨우 하나가 남았으니 휴양지에 있는 그저 그런 코스겠거니 생각했다가 설마를 만난 셈입니다.
* * * *
택시를 타고 여러번 지나쳤던 박물관에 들렀습니다. 베트남의 오랜 역사에 비해 전시물도 설명도 허술헤 보입니다. 박물관을 안내하는 도슨트를 따라다니다가 흥미를 잃고 있던 차에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만큼 허술하게 놓여 있는 불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떤 괴물의 등위에 서 있는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진 불상입니다. 도슨트가 다가와서 이 불상을 지고 있는 바다 괴물의 의미와 불상의 얼굴이 네 개인 이유는 부처가 온 세상을 다 바라보기 위한 것을 설명해 줍니다. 과거를 보고 있다는 뒤통수에 달린 얼굴이 정면을 보는 얼굴보다 작습니다. 왜 그럴까 하며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벽에 바짝 붙자 덩달아 머리를 들이미는 둘째에게 왜 과거의 얼굴은 미래의 얼굴보다 작아야 할까 물어봅니다. 옛날 일은 자꾸 까먹으니까 작아지는 거라고 합니다.
내일은 호치민을 거쳐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학교로 나는 실적과 손익을 따지는 생활로 돌아가게 되고, 오늘은 자꾸 까먹어지고 작아지는 과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