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콘크리트 틈에 떨어진 씨앗도 싹을 틔웁니다

Sembawang golf resort, Singapore

by 달을보라니까



오늘은 여행지가 아니라 집에서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서울에서 싱가폴로 이주하고 얼마 지났을 때 당신이 내게 싱가폴 생활은 좀 어떠냐고 물어봤을 때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만일 지금 당신이 같은 질문을 한다면 관계로부터의 자유라고 말하겠습니다.


좁은 지역에 인종과 문화가 뒤섞여 있는 이곳에서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샐러드볼에 담긴 서로 다른 채소처럼 싱가폴이라는 마요네즈를 같이 덮을 뿐 서로 다른 동네에 제각기 자신들이 살던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식민시대에 지어진 유럽식 건물에 인도인, 중국인, 프랑스인, 한국인, 미국인들이 저마다의 명패를 달고 색깔을 칠해 만들어내는 놀라운 다양성은 관용으로 혹은 무관심으로 불수불입(不輸不入)의 자유를 줍니다. 그런 면에서 싱가폴에서는 모두가 비주류이고 그런 만큼 문화적 강압성과 주도적 헤게모니가 눈에 띄게 약합니다.


비록 이 나라에 정치적 자유가 있느냐는 비판과 반노동 성향 그리고 부의 편중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불과 50년 전 허허벌판이었던 이곳이 1인당 GDP 5만 불을 훌쩍 넘기는 부국으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싱가폴은 놀라운 나라입니다. 게다가 많은 돈을 벌지 못하는 저임금 노동자라 하더라도 하루 일을 마치고 퇴근할 때는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었다는 것은 참 부럽습니다. 그러나 그 뒷면에는 지속적이고 철저한 이데올로기 교육이 있음을 빠뜨릴 수 없고, 자신의 장래가 십 대 초반에 이미 성적순으로 결정되고 다시는 변경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냉정한 엘리트 교육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싱가폴의 역사는 화려하고 놀라운 성장과 성공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감시와 처벌의 역사이자 파워엘리트들이 만들어 온 획일적인 원형 감옥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궁핍과 경제적 불평등 속에서 민주주의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당신의 말을 배신이라 여긴 적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콘크리트 틈새로 잘못 떨어진 민들레도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 싹을 틔운다는 것입니다.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국가와 약간의 구속이 있더라도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국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의 당신과 나이가 들고 이제 부양가족이 있는 지금 당신의 선택은 같은 것일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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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용트럭 뒤를 한참 따라가다 보면 마침내 골프장 입구에 도착합니다. 골퍼들이 형형색색의 밝은 옷을 입고 즐겁게 골프를 치는 곳에서 철조망 하나 건너로 적도의 강한 햋살에 검게 탄 군인들이 보입니다. 셈바왕 골프 클럽은 군인과 군인 가족을 위한 휴양소로 지어졌다가 민영화된 곳입니다. 그러나 토지의 소유권은 여전히 정부에 있으므로 근래 문을 닫은 싱가폴의 다른 몇몇 골프장들과 마찬가지로 몇 년 후에는 없어질 운명입니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회사 동료들과 라운드입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다른 언어로 살아온 네 사람이 하이하고 만나서 18홀 그린에서 악수로 헤어지곤 합니다. 아침에 만나서 같이 밥을 먹고, 라운드를 마치면 다 같이 벌거벗고 샤워장에서 만나는 한국 사람들과는 참 다릅니다.


1번 홀 티박스에 올라서서 언제나 부담스러운 오늘의 첫 샷을 준비합니다. 언덕 위에서 대략 30미터 내리막을 향해 티샷을 하고 세컨샷에서 다시 그만큼의 경사를 올라가야 합니다. 티샷이 낙하하는 지점의 오른쪽에는 연못이 있고 왼쪽은 OB라서 이 무척 좁아 보입니다. 첫 홀을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싶지만 인생에서도 골프에서도 어렵다고 피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평소처럼 적당히 봐주지 말고 정식 R&A 규칙에 따라 진지하게 게임하기로 한 만큼 다들 한 타 한 타에 신중합니다. 사실 이건 아프리카 동쪽 작은 섬 프랑스령 레위니옹에서 태어나 한때는 프랑스 유소년 국가대표였다가 부상으로 인생 경로가 바뀐 니꼴라가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칠팔 년 전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직업을 잘못 선택했으니 프로리그에서 몇 년이라도 뛰어보다가 오라고 말하는 내게 자신이 느끼는 투어프로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조용하고 단호하지만, 남들이 꺼리는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는 그를 보면 철없었을 십 대에 이미 한 분야에서 최고 수준에 올랐다가 좌절했던 그가 거쳐왔을 거칠었을 인생의 한동안이 어땠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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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세 개로 단단히 무장한 파 5. 내게 어려운 것은 남들에게도 어렵습니다


국토의 대부분이 해발 100m 미만의 평지인 싱가폴에서 셈바왕골프장은 업다운이 많고 언듀레이션이 심한 특이한 곳입니다. 그리고 싱가폴의 다른 골프장과 달리 페어웨이가 좁고 장애물이 촘촘하기 때문에 섣부르게 공격했다가 후회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위험을 피하거나 도전하는 선택을 할 수 있고 그에 따른 보상과 응징이 있다는 점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나름 재미있고 다이나믹하지만 이 골프장은 어딘가 이상합니다. 라운드를 시작하기 전에 몸을 풀거나 퍼팅을 연습할 장소도 변변히 없고, 파 5들이 연속으로 몰려 있는 것, 그리고 하루의 라운드를 마치는 마지막 홀이 파3라는 것이 특이하다기보다는 이상한 것 같습니다.


17번 홀 티박스에서 이 홀을 어떻게 풀어갈지 마음이 오락가락합니다. 불안했던 티샷이 옆 홀 깊숙이 날아갔지만 결과적으로는 지름길로 온 셈이 돼서 드라이버와 세컨을 모두 잘 친 니꼴라를 서드샷지점에서 만났습니다. 내 플레이를 보고 있던 니꼴라가 페어웨이로 돌아온 내게 어려운 곳에서 포기 안 하고 정말 잘했다며 엄지를 들어 올립니다. 나보다 열 살 이상 어린지만 스승은 어디에나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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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를 만나는 일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직접 무엇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당신과의 대화에서 삶의 동기와 어울림을 배우듯, 퍼팅라인에 있는 마크를 옮겨주면서 동전을 뒤집어 놓는 니꼴라의 습관에서 고수의 한 수를 배웁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체력과 시간, 집중력 따위를 100% 동원한다고 해도 나는 니꼴라와 동등하게 경쟁할 수 없겠지만 나는 골프장으로 가는 길이 즐겁고, 항상 라이프 베스트를 꿈꾸며 첫 샷을 준비하곤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길가의 민들레는 피어나고 콘크리트 틈새에 떨어진 씨앗도 싹을 틔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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