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chid golf & country club, Singapore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여기는 오키드 골프 & 컨츄리클럽입니다. 싱가폴의 노동조합인 NTUC에서 노동자의 복지를 위해 골프 연습장과 아란다로 불리는 9홀 코스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해서 점차 노조원이 늘면서 두 번째 9홀을 추가되어 18홀 코스가 되었다가 마지막으로 덴드로코스가 더해져서 27홀 골프장이 되었습니다.
노동조합, 그것도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개방형 조합이라 그런지 마주치는 사람들도 보통사람 같아 보입니다.
지금 싱가폴을 생각하면 저들 중 대다수가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하늘을 가린 집과 비가 오면 진창이 되는 길거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나와 동갑인 싱가폴 친구는 부둣가에서 날품을 팔기 위해 기다리던 부모 옆에서 하루를 보내곤 했고 운이 좋은 날에는 제대로 된 저녁을 먹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이 훨씬 많았다며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온 국민이 똘똘 뭉쳐 가난을 이겨내고 세계에서 손꼽는 부자가 되었다며 싱가폴을 부러워하던 당신을 생각합니다. 밥이 민주주의이고 경제적 궁핍 앞에서는 민주주의란 허울에 불과하다는 당신의 말을 한동안 배신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서로서로 감시하게 하고 오로지 앞만 보도록 세뇌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성장과 번영은 현재의 밥은 해결할지 몰라도 미래를 망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처럼 빨간 약과 파란 약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주저하지 않고 빨간 약을 집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선택이라는 것은 어느 한순간이 아니라는 것과 이미 나는 수많은 파란 약을 먹어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내 친구의 부모가 막노동하던 부두에는 천문학적인 돈이 움직이는 금융가가 들어섰고, 운수 좋은 한 끼를 해결했다는 라오파샅은 수많은 관광객이 들리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싱가폴의 가난했던 과거가 지나가고 잊힌 자리를 오늘 새벽에 트럭의 화물칸에 쪼그리고 앉아 국경을 넘어온 말레이시아 노동자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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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라운드는 오후 5시에 시작하는 절반의 나이트 게임입니다.
반다코스의 스타트 지점에서 티샷을 준비하고 있는 앞 팀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멀찍이 떨어져 있자니 라운드를 마친 사람들이 미소와 가벼운 목례를 하고 지나갑니다. 갑자기 생면부지의 저들이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이 감정은 등산하면서 마주치는 사람에게 반갑게 인사하고 마실 물을 나누는 동질감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인간의 공감은 즐거움보다 어려움과 고통에 더 민감하기 때문이라 생각을 바꿉니다. 누구나 라운드에서 기쁨, 희망, 절망 그리고 분노를 느끼게 되고 그중에서 절망과 분노를 가장 오래 기억하고 각자가 느끼는 그 총량의 상대적 무게는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잠시 딴짓을 하는 사이에 앞 팀이 세컨샷을 마쳤습니다. 1번 홀은 골프장의 첫 홀은 이래야 한다는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이 티박스에서 핀이 바로 보일 정도로 시원하게 뻗은 파4입니다. 별다른 장애물도 없는 편안한 시작이지만 티샷을 마치고 가보니 잘 쳤다고 생각했던 내 볼은 우측의 러프에 들어가서 다음 샷에서 제대로 볼을 컨택하기도 어려워 보이는데 훅이 났다고 걱정했던 다른 동반자의 공은 페어웨이 한가운데 있습니다. 비슷한 지점이라도 어떤 각도와 회전으로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서 다음 샷의 난이도가 달라지는 우연까지도 변수에 추가되는 골프라는 게임이 과연 얼마나 공정한가 싶습니다. 어느 파 4에서 네 번째 샷으로 겨우 그린에 도착해서 맥이 빠집니다. 크게 잘못되지 않은 네 번의 샷이 따로 흩어져서 다른 평범한 샷 사이에 있었다면 게임 속에서 만회됐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작은 실수라도 모이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운이 좋다는 것은 복권과 같은 뜻밖의 행운이 아니라 작은 실수들이 모여 큰 실수가 되지 않는 것이라는 당신의 말을 생각합니다.
공놀이에 정신 팔린 주인을 기다리는 카트 위로 옅은 석양이 떨어집니다
전반을 마칠 무렵에 밤이 시작됐습니다. 당신은 야자수 해변을 물들이는 붉은 노을의 낭만적인 일몰을 상상하겠지만, 사실 이곳에서의 낮과 밤은 누군가가 손바닥을 휙 뒤집는 것처럼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금세 어두워진 티박스에 서면 마치 다른 게임을 하는 것 같이 낯설고 어리둥절합니다. 마치 오래전부터 여러 차례 예고돼서 모두가 알고 있는 법령이나 제도가 시행된 첫날 같습니다.
덴드로코스는 특이하게 파5가 세 개인 파 37입니다. 그리고 그 세 개의 파 5 모두 투온을 노릴만한 길이라서 장타자들이 좋아합니다. 버디가 많이 나오고 스코어가 좋을 것 같지만 벌타가 더 많이 나오기 때문에 생각만큼 점수가 나오지 않곤 합니다.
4번 홀 티박스에서 서니 좀 막막해집니다. 160야드에 불과한 파3지만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바람을 어떻게 뚫고 갈지 싶습니다. 지금처럼 어두컴컴한 밤이 아니라 밝은 낮에 플레이했다면 달랐을까 싶지만 생각해보니 레슨프로들이 강조하듯 단단한 멘탈로 평소와 같은 루틴과 자세와 샷을 유지하는 것이 정말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그리고 그들은 진짜 그렇게 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덴드로의 두 번째 파 5에서 장타 욕심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티샷이 100야드도 못 가서 벙커에 빠졌습니다. 간신히 빠져나와서 다시 레이업해서 그린으로 올라서는데 동반자가 자신은 자신은 투온을 했으니 이글 펏을 남겼다고 신나 합니다. 결국 나는 보기를 기록했지만 무척 기분이 좋았고, 이글을 노리다가 파를 기록한 동반자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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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마치고 클럽하우스로 돌아오는 길에 연습 그린에서 퍼팅과 치핑 연습에 빠져있는 사람이 보입니다.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듯 신중하고 조심스럽습니다. 문득 골프는 과정의 운동인가 아니면 결과의 운동인가라는 화두가 떠오릅니다. 저렇게 열심히 연습한 다음 날 라운드에서 기대보다 못한 스코어가 나오면 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집니다.
사실 이 질문은 허위입니다. 누구에게나 결과는 중요하고, 누구나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과를 우선시하는 사람을 천박하고 세속적이며 이기적인 사람으로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실패에 낙담하는 사람에게 그동안의 과정에 충실했으니 괜찮다며 위로하곤 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는 그런 위로에서 위안을 받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위로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처받고 고통받은 사람에게는 공감이 바로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눈 녹은 진창 위에 남아있는 새 발자국 같다는 소동파의 시구로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수없이 많은 흔적이 남아있지만, 지금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가는 길과 당신이 가는 길이 만났을 수도 있고 안 만났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아예 다른 세상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아쉽고 외롭고 두려운 나와 당신의 길에 공감과 위로 그리고 평화와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